엄마는 요양원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곳은 엄마인 자신을 버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그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진 못한 상태에서 엄마의 요양원 입소를 결정했다.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부산에 살고 있고 오산에 사는 나머지 4남매는 2살짜리 딸아이를 키우는 나를 제외하고 다 맞벌이를 하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거구가 되어 버린 엄마를 투석시키고 기저귀 갈고 밥 먹이고 씻기고 소독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죄책감은 계속 따라다녔다. 우리는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절대 엄마를 버리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요양원에 모실 거고 엄마를 매일 보러 갈 거란 얘기로 엄마를 안심시켜야 했다. 오산 외곽에 있는 시설이 좋다고 소문난 요양원은 대기를 오래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작은 요양원을 방문했다. 내부도 깔끔하고 일하시는 분들도, 노인분들도 대체로 밝아 보여서 우리는 그곳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의 말에 전혀 안심되지 않았던 걸까. 요양원 얘기가 나온 며칠 뒤 엄마는 갑자기 의식을 잃어버렸다. 또다시 성빈센트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의식을 잃은 원인을 병원에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의식만 없을 뿐이지 다른 곳은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 만에 엄마에게 욕창이 생겼다. 욕창 방지를 위한 조치를 해두었지만 소용없었다. 간병인은 엄마 간호가 힘들다고 돈을 더 달라는 전화만 해댔다. 간병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병원에서 퇴원을 요구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엄마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했던 요양원에 모셨다. 엄마의 몸은 욕창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아직 쌀쌀한 3월이었는데도 반소매 라운드 면티를 사 오라고 했다. 흰 면티를 갖다주고 의식이 없는 엄마 귀에 대고 "엄마, 힘들지? 이젠 외할머니 곁으로 가"라고 말씀드렸다.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심장이 여러 가닥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가보니 엄마가 까만 변을 많이 본다고 했다. 몸은 더 부어 있어서 우리 엄마 같지 않았다. 엄마가 요양원에 간 지 5일째 되는 날 새벽에 요양원에서 큰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위중해져서 한국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한국병원으로 달려갔다. 2012년 3월 15일에 요양원에 들어가서 3월 20일 아침 9시에 엄마는 그렇게 기다리던 자식들 하나 없이 홀로 세상을 떠났다.
제철인 줄 알고 피었던 진달래가 꽃샘추위에 화들짝 놀라 다시 꽃잎을 접을 정도로 춥던 그해 3월 엄마를 오산 장례식장에 모셨다. 큰오빠와 올케언니는 장례식장에 가자마자 빈소를 선택하고 제단과 꽃값, 관과 수의는 얼마짜리를 해야 하는지 접대 음식을 어떤 것으로 할지도 의논해야 했다. 영정 사진도 준비한 게 없어서 엄마의 증명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만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셔도 돈으로 풀어야 할 것들은 만만치 않았고 아직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부산에서 첫째, 둘째 언니네가 왔다. 첫째 언니는 장례식장 입구에서부터 “아이고 엄마! 아이고 엄마!” 곡소리와 함께 등장했다. 첫째 언니만이 엄마의 장례식장에 어울리게 행동할 줄 알았다. 조문객이 뜸해진 야심한 밤 우리 형제들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엄마를 추억했다.
큰오빠는 좀처럼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다. 술은 집 밖에서 먹어야 맛이 나는지 동생들하고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장례식에서 오빠는 술에 취해 누가 묻지도 않은 엄마 얘기를 했다. 큰오빠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는 것도 신선했는데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던 오빠의 그 허탈하면서도 지친 표정은 꽤 인상적이었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일찍 죽어버린 장남을 대신해서 엄마는 큰오빠에게 의지했다. 큰오빠는 자신에게 버거운 가난의 짐을 나누던 엄마에게서, 그런 엄마가 있는 가난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가 떠나버린 그날 큰오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생들 앞에서 술의 힘을 빌려 맘껏 슬퍼했다.
다음 날 아침 입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관 이후에는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 우리는 통유리로 되어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그 방에 엄마가 누워있었다. 엄마는 부기가 싹 빠진 초연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엄마는 보통 미간에 인상을 쓰고 자곤 했지만, 그때는 고통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생전의 뽀글뽀글 파마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수의 아래 꽃 버선을 신고 있었다. 장의사는 까만 빗을 주면서 엄마 머리를 빗겨주라고 했다. 머리를 빗겨주면서 차디찬 엄마의 조그맣고 주름진 얼굴을 마지막으로 매만져주었다. 외로운 저승길 잘 가시라고 노잣돈도 드렸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만난 입관 의식은 오열 속에 끝이 났다.
다음날 우리는 수원 연화장으로 향했다. 이윽고 엄마가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아파도 우리 엄마는 철의 여인이어서 일어날 줄로만 알았던 어리석은 자식들이 엄마가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불길 속에 사라져 몇 개의 뼛조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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