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찾아서

by 수연길모
죽음은 단지 이 삶으로부터 고통과 고뇌가 없는 다른 존재로의 변화일 뿐이다. 모든 아픔과 부조화는 사라질 것이며, 영원히 살아남을 단 한 가지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지금’ 서로 사랑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들과 함께하는–많은 부모가 얼마나 불완전한가 한 것과 관계없이-축복을 얼마나 오랫동안 누릴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을 때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사후생,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엄마가 죽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다’라는 명제는 엄마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저 신비한 장막에 가려진 존재였다. 엄마로 인해 그 장막이 거둬졌고 죽음은 마침내 다음 차례인 우리 형제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엄마가 죽음이라는 문으로 들어간 뒤 어디로 갔는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그래서 책 속에 길이 있다기에 백 권의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영혼’이나 ‘죽음’ 또는 ‘임사 체험’과 내 종교였던 ‘불교’와 연관되는 ‘윤회’ 같은 키워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배운 죽음은 너무도 내 삶에 가까이 있었다. 그 안에서 죽음이 비껴간 흔적들이 그제야 보였고 죽음이 빗발친 곳을 용케도 피해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왜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엄마의 죽음으로 예전만큼 죽음이 두렵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엄마의 육신과 정신이 사그라져 가던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죽음으로 건너가는 과정은 여전히 두렵다. 노인이 되면 연골이 닳아서 걷는 것도 고통스럽고, 괄약근도 약해져서 기저귀를 차야 할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치매는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노년의 모습일 것이다. 또 암은 어떤가. 그렇다고 아직 오지도 않은 노년 때문에 현재를 걱정만 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것은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는 것과 자신이 노인이 되어 병이 든다면 어느 선까지 치료를 받을지 자식이나 배우자에게 유언해놓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눔으로써 내가 죽고 난 뒤 나의 유지를 자연스럽게 받들게 할 것이다. 우선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내 삶이 녹아 있는 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세대에는 요양원이 부모가 자식에게 버려지는 곳이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차선이 아닌 노인이 자기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이 될 수 있도록 사회의식도 시설의 상황도 더 향상되길 바란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그리고 올해는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도 국민건강 보험공단에 가서 작성할 계획이다. 그리고 나는 죽으면 화장한 뒤 내 유골이 납골당에 갇혀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 유골은 법적으로 허용되는 바다나 산골에 뿌려 자연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흘러 내가 갈 차례가 된다면 나는 살아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용서해서 이승에 여한 없는 가벼운 영혼으로 엄마를 만나고 싶다.


엄마를 찾아 떠난 여정에서 발견한 것은 엄마가 죽음이라는 암흑의 세계에 간 것도 죽음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단지 죽음으로 옷을 갈아입은 영혼이었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되고 난 후 겪은 엄마의 죽음을 통해 깨달은 것은 엄마라는 존재는 죽어서도 자식을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엄마도 내가 부르면 언제든 내 곁에 오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그 영혼은 내 세포 하나하나에 살아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창세기 26, 24-



엄마를 찾아 백 권의 책을 읽고 난 후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 책들이 다음 해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교육학, 교육 심리는 물론이고 철학, 성인 교육학 등을 공부했고 많은 스승, 독서 그리고 첩첩이 밀려오던 과제물들을 통해서 내 인생을 귀납적으로 보는 행운을 얻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맨땅에 헤딩하며 살다 어느 날 엄마라는 우주가 사라진 후 만난 학문의 바다에서 나는 행복하게 헤엄치며 나 자신과 내 삶을 정의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논문 주제를 정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는 그곳으로 이끌어준 엄마의 죽음을 거울삼아 ‘중년의 죽음 준비 교육의 필요성’이란 주제로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다.


백 권의 책 읽기 과장에서 중후반으로 갈수록 불교 신자였던 내게 기독교에 관한 책이나 내 지식수준이나 관심사를 볼 때 절대 고를 리 만무한 이상한 책들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밀쳐내지 않고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내 안에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느꼈다.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책은 로나 번의 ‘수호천사(Angels in my hair, 이레 2011)’라는 책이었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책으로 아일랜드에 사는 가톨릭 신자인 로나 번은 지적장애와 난독증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호천사들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가 중년이 되자 그녀의 수호천사는 로나의 능력과 천사들의 존재에 관하여 책을 쓸 것을 권유해서 세상 밖으로 나온 책이 바로 ‘수호천사’다. 내가 느낀 감동을 나누고자 절판된 ‘수호천사’를 중고매장에서 몇십 권을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그 책을 읽은 친구들의 반응은 ‘이상하다’ ‘무당 같다’ ‘이런 걸 믿냐’는 등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음이 갔다. 그 책으로 내 삶을 이해하는 설명서가 내 손에 쥐어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죽음을 모면했던 순간들이 있었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한꺼번에 해석이 되면서 위험한 순간마다 혼자가 아닌 수호천사와 함께였음을 깨닫게 되었고 엄마가 돌아가실 때도 수호천사가 함께였다고 생각을 하니 한없이 감사했다. 나는 그 뒤로 매 순간 수호천사와 대화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에겐 말할 수 없었다.


딸아이가 7살이 되자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딸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도, 내가 새로 갖게 된 모임에 나가도 가톨릭 신자가 많았고, 처음 놀러 간 집 벽엔 큰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전에도 만나는 사람 중에 가톨릭 신자가 있었을 텐데 유난히 그해에는 자신의 종교가 가톨릭이라고 밝히는 이들이 많았다.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같이 학습지 교사를 하다 결혼 후 미국으로 가신 동료 선생님을 몇 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여름 장맛비를 뚫고 만난 선생님의 첫마디는 황당했다.

“윤희 선생님 이제 성당 나가야겠다.”

“성당요?”

5년 만에 만나자마자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신기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아, 성당에 가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뭔가에 홀린 듯 선생님의 말씀에 그 어떤 거부반응이나 의문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뒤 선생님과 만남은 곧 잊혔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딸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2월 어느 날 세 식구가 함께 근처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엄마표 영어’에 관한 책들을 훑어보다 그중에 한 권을 읽어나갔다. 저자는 엄마표 영어의 성공 비결을 열 가지를 소개했는데 마지막에는 가톨릭이라는 종교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교육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단락을 읽고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제가 무릎 꿇겠습니다.’ 그런 다음 도서관 밖으로 나가 집 근처 성당에 전화해서 성당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6개월을 기다려 6월부터 12월까지 새 신자 교육을 받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 ‘루치아’가 되었다.

엄마는 나를 다시 학생이 되게 해서 공부하게 하고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백을 만나게 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을 찾아가기 위해 돌을 놓아둔 것처럼 하느님도 내가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에 많은 사람과 수호천사를 보내시어 내 눈높이에 맞게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신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도 나도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었고 그 사랑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두 유산보다 더 큰 유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몇 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도스토옙스키-


작년에 형제들과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각자 기억이 맞지 않았다. 언니 오빠들의 나이가 있고 임의대로 이야기에 살을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정자 엄마는 우리에게도 잊히는 그것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에게 잊히는 건 시간 문제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려웠다. 그러다 작년에 우연히 유튜브로 이슬아 작가의 세바시 강의를 듣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 하는 일”



엄마를 불멸화하고 싶었다. 엄마의 삶을 써 내려가고 후손들이 우리 안에 이정자 엄마의 강철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글을 써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글쓰기는 방송대 교육학과 편입 후 3년 동안 과제와 논문으로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으니 글쓰기 기술을 조금만 더 배우고 매일 쓰는 연습을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를 찾다 모 작가가 운영하는 글쓰기 유료 카페에 가입해서 3개월 동안 매일 글을 썼다.


시간은 흘러 2021년이 되었다. 글쓰기 카페에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쓰기 카페를 떠나 혼자 글쓰기를 하려면 또 다른 곳에 나를 매어두어 글을 쓰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기로 했다. 브런치는 네이버 블로그와는 다르게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없다. 브런치 측에 내 글 세 편과 자기소개, 향후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써서 보내면 심사를 거쳐 합격 또는 불합격 메일로 온다. 그동안 카페에서 써놓은 글을 퇴고해서 글 세 편을 준비하고 브런치에 도전하는 이유를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다. 올해 3월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너무도 뿌듯했다. 내가 작가라니! 일주일 정도는 여기저기 자랑하며 우쭐대며 지냈다. 그러나 작가로서 글을 매일 쓰기로 다짐했지만, 일주일에 한 편이라도 글을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강제성이 사라진 뒤 나의 일상은 집안일과 딸아이 뒤치다꺼리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시간을 정해서 꾸준히 하는 습관을 잡기가 처음엔 무척 어려웠다.


그러다 오산시 양산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내 인생의 첫 책 쓰기’라는 강좌에 참여했다. 엄마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핑곗거리만 만들며 미루던 내게 이 강좌는 구세주였다. 5월 10일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고 있는 이 강좌는 첫 5주 동안은 강원국 작가님께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배웠고 이후 홍승완 작가님께 출판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배우고 매주 과제를 올리며 11월까지 열심히 달리고 있다. 이 강좌에서 내 글과 내 출판 기획서의 장단점을 작가님과 동료 선생님들에게 합평을 받은 일은 다시없을 소중한 기회였다. 우리는 서로 힘을 북돋아 주고 이끌어주며 여름에서 가을로 향하고 있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엄마가 살았던 곳을 기준으로 크게 화순, 부산, 오산으로 나누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화순, 부산 이야기는 부산 둘째 언니의 공이 컸다. 아마 부산 둘째 언니가 없었더라면 엄마의 이야기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오산 이야기는 두 올케언니와 셋째 언니 그리고 나의 기억에 기대어 썼다. 재밌는 것은 딸들의 기억 조각과 두 며느리의 기억 조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언니들의 두리뭉실한 기억과는 달리 큰 올케언니는 숫자에 날카로웠고 작은 올케언니는 내가 전화를 하면 어색함에 모르쇠로 버텼지만 일단 말이 터지면 정교함이 살아있는 기억력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오빠들은 어릴 적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빠들은 묻는 것조차 질색했다. 아마도 그들에게 극복이 안 되는 상처가 있는 듯했다. 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는 엄마의 자식들과 두 며느리의 기억으로 퍼즐 조각처럼 꼭 맞아 들어갔다.


그러나 초반에 둘째 언니에게 전화하면서 질문을 대충 하면 언니의 기억 창고는 열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좀 더 그 상황에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자 기억의 문은 활짝 열리고 노다지가 쏟아지곤 했다. 일단 한 기억이 터지면 다른 기억의 창고를 건드리는 건 시간문제였고 이야기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질문만 잘 준비된다면 시간이 많이 지나도 글은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생전에 형제는 한 나무의 가지라고 늘 얘기했다. 이 글을 쓰기 전 우리 형제들은 우애로 똘똘 뭉친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가 돈 문제로, 해묵은 오해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는 쓰러진 나무의 가지였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선 하루에 적어도 세 번, 많으면 대여섯 번 전화 통화를 해야 했다. 엄마의 이야기와 언니들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구술하면서 언니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스스로 치유되기도 했다. 또 몰랐던 언니 오빠들의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들으면서 눈물로 글을 쓰기도 했다. 언니 오빠들의 희생으로 내가 2021년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그들이 오늘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글이 한편 한편 완성될 때마다 같이 읽으면서 형제이면서도 알지 못했던 서로의 상황과 감정을 알게 되자 미움과 오해는 점점 누그러지고 연민과 사랑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사랑’이라는 유산은 남아 우리 육 남매를 지탱해주고 있고 그 사랑이 이 쓰러진 나무를 계속 자라게 했다. 어쩌면 우리 6남매는 앞으로도 삶의 곳곳에 숨겨진 엄마의 유산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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