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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ul 13. 2022

운명의 나라, 운명의 남자 2

어느 잘생긴 교회 오빠에 대한 단상 

얼굴도 모자라 귀까지 빨개져 정신 못 차리는 제이에게 나는 결혼했냐는 질문을 만나자마자 해야 했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Yes.”

“어? 진짜? 와! 정말 축하해.”

뭐? 뭐라고? 결혼했다고? 

그는 부산 서면 ELS를 그만둔 뒤 말레이시아, 페탈링 자야 ELS에 와서 근무하게 되었고 말레이시아 여성과 결혼해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사실 나도 제이와 결혼한다면 지루해서 내 명대로 살 순 없었을 것이고 천만다행이라며 잠깐 부풀었던 기대를 위로했다. 

이로써 첫 번째 나의 운명의 남자 제이는 물 건너갔고 처녀 보살의 예언은 아직 유효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나의 운명의 나라라는 점은 다른 부분에서 드러났다. 어학원까지 매일 왕복 40분을 걸어 다녔던 나는 말레이시아에 온 지 한 달 만에 구릿빛 피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현지어로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외모부터 나는 말레이시아와 운명이었다.      


말레이시아에 온 지 한 달쯤 지났을까. 계획에 없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writing 선생님은 도로시라는 엄지공주처럼 키가 작고 얼굴이 뽀얀 귀여운 중국인 선생님이었다. 도로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나이대도 성격도 비슷해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무리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해도 시간이 남아도는 주말에는 심심했다. 쇼핑도 하루 이틀이고, 영화 관람도 매일 즐겁진 않았다. 그런 유학생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도로시는 일요일에 교회를 나오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도로시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학생의 과제 점수를 깎는다 카더라 하는 황당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그 소문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일요일 아침 룸메이트 메기와 도로시를 기다렸다. 매주 도로시는 우리를 태우러 왔지만, 그녀가 오지 못하면 같은 교회 신자였던 신시아와 토마스라는 부부가 자주 데리러 왔다.      

주말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자 어느 날 신시아 토마스 부부는 평일 저녁 가정집에서 하는 ‘셀 모임’이라는 곳에 나를 초대했다. 신시아 토마스 부부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온 나를 소개하며 기도 모임은 시작됐다. 그들은 나를 위한 기도도 잊지 않았다. 모든 기도와 나눔이 끝나고 간식을 먹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식탁에 앉아 이것저것 먹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호남형의 중국인 남자였다. 머리숱도 눈썹 숱도 빽빽했다. 

“성경 말씀이 어렵죠?” 다정하게 웃으며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네 뭐 한글로도 어려운데 영어는 더 어렵죠” 

“제가 영어 성경책을 하나 드릴까요?” 

“아니요. 아니에요. 어린이용 성경책이면 모를까 두꺼운 성경책은 부담스러워요”

나는 그의 호의를 극구 사양했다. 

“한국에서 오셨으면 심심하지 않으세요? 보통 학원 끝나면 뭐 하세요?” 눈을 반짝이며 그가 또 물었다. 

“네, 보통 메가몰에 가서 영화 봐요. 친구랑도 가고 혼자도 가구요.”

“그래요? 요새 무슨 영화 보셨어요?” 

“‘라스트 사무라이’를 봤는데요. 좀 어이없었어요. 맨날 미국은 정의로운 해결사예요. 참나.”  

“맞아요. 미국은 늘 어딜 가나 영웅이네요.” 그가 맞장구쳤다.

우리는 다양한 화재로 대화를 나눴다. 비록 영어로 말했지만 막힘이 없었고 대화 곳곳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담에 같이 영화 보러 가요. 제가 제 전화번호 드릴게요. 전화 주세요” 그가 말했다.

‘어? 이건 뭐지? 나랑 헤어지는 게 아쉬운가? 푸훗~’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얼떨떨하고 설렘에 명치가 찌릿했다. 

셀 모임 후 일주일 동안 그에게 언제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어느덧 나는 그와 만나게 되면 어떤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대사를 준비하고 펼쳐질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금요일이 되자 용기를 내어 수화기를 들었다. 내 심장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질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셀 모임에서 만났던 한국에서 온 니키타예요. 기억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기억하죠. 잘 지내셨어요?” 

‘그래, 당연히 기억하겠지!’

“내일 시간 되시면 영화 보러 갈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 잠깐만요. 일정 좀 볼게요. 음... 어쩌죠?  내일 premarriage course가 있긴 한데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네요”

뭔 메리지? 이건 무슨 소리야?

“premarriage course가 뭐예요?”

“제가 석 달 후에 결혼하거든요. 교회에서 결혼 전 교육을 하는 거예요.”

“아, 결혼요??? 축하드려요. 어, 에, 그러니까, 아, 전 그럼 다음에 전화할게요.”

 결혼이라는 말에 혀가 굳어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저 크리스천으로서 나를 봉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결혼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미소 짓는 그의 표정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남녀가 유별한데 눈웃음을 살살 치지 않나 전화번호를 주고 영화 보자고 하지 않나 웃음도 친절도 헤퍼도 너무 헤픈 교회 오빠였다. 교회 오빠 이후에도 몇 명의 중국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 인연들은 비켜가기만 할 뿐 말레이시아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던 처녀 보살의 예언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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