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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un 23. 2022

운명의 나라, 운명의 남자1

나를 기억하나요?

4개월의 백수 생활을 끝에 소각로 제조 업체 자재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입사하던 그즈음에 태국으로 소각로를 수출하기 시작한 그 회사는 최근 들어 영어로 된 팩스가 밀려 들어와 골치를 앓고 있었다. 면접 볼 당시 상무님은 내게 해석해보라며 종이 한 장을 들이댔다. 태국 바이어에게서 온 영문 팩스였는데 누군가 단어 밑에 친절히 뜻을 찾아 써놓아서 해석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상무님은 이런 영문도 모르고 나의 영어 실력에 놀라워했다. 그렇게 나의 영어 실력은 부풀려진 채 그 소각로 회사 자재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각로 회사에 입사하고도 퇴근 후 영어학원으로 달려가는 나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얇디얇은 월급이었지만 원어민 영어 회화 학원비엔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7시가 되면 니키타로 변신하는 영어학원에서의 시간은 죽상을 하고 앉아 시시때때로 상사에게 무자비하게 깨지는 찌질한 내 삶의 오아시스였다. 

처음엔 회사 근처 학원을 공략하다가 서면의 ELS 어학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 반 강사는 백인 남자였고 키가 컸다. 부끄럼을 잘 타서 자주 얼굴이 빨개졌는데 이름은 Jay였다. 그의 수업은 무척이나 진지했고 지루했다. 첫날 열 명 남짓이었던 수강생은 점점 줄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은 Seed라는 여자애와 나만 나온 것이었다. Seed와 나는 Jay에게 맥주나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처음으로 교실 밖에서 알코올 동반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Seed와 나는 Jay를 배신하지 않았고 야외 수업은 계속되었다.      

그 후로 2, 3년이 흘러 우리 가족은 경기도 오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학습지 교사로 일하면서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중 고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동료에게 최근에 신내림을 받은 처녀 보살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동료와 함께 예약하고 점집에 갔다. 내 고민을 듣더니 처녀 보살은 거침없이 말했다.

“말레이시아를 가세요. 거기 가면 남자를 만날 거예요. 그 남자와 아주 잘 살 거예요. 거기서 살아요. 한국 오지 말고요.” 

한국에 오지 말라고? 남자를 만나? 우리 엄마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이야기였지만 나는 신이 났다. 나는 구질구질한 내 삶에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점집을 다녀온 후 어학연수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택시로 20분 거리에 있는 ‘페달링 자야(PJ)’라는 곳에 있는 ELS 어학원에 등록하고 어학원이 위탁하는 기숙사에 머무르기로 했다. 1년을 예상하고 떠난 어학연수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스콜이 대포 소리 같은 천둥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학원 측에서 말해준 대로 숙소까지 데려다 줄 Mr. Tan을 무사히 찾아 기숙사에 도착했다. 내 방에는 같이 학원에 다닐 룸메이트 Maggie라는 24살 중국 여자애가 먼저 와있었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기숙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ELS 어학원에 도착했다. 먼저 레벨 테스트를 하고 학원 생활에 대해 설명을 들으니 오전이 지나갔다. 점심은 학원 안의 매점을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 어제 비행기로 같이 들어온 에릭이라는 한국인 남학생과 진이라는 한국인 여학생과 함께 매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매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낯익은 외국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본 순간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Hi! Jay!!! I’m Nikita! Can you remember me?”

이 말을 하는 와중에 내 머릿속에선 그 갓 신내림 받은 처녀 보살의 말이 울려 퍼졌다.

‘거기 가면 남자를 만날 거예요. 그 남자와 아주 잘 살 거예요~요~요~요~’

유머 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이 멀대 같은 남자, Jay가 내 남편이 된단 말인가. 

내 머릿속에서 이런 폭풍이 한바탕 지나자 Jay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얼굴 빨개지는 버릇은 더운 나라 말레이시아에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지하철 타고 가는 옆 동네도 아니고 비행기로 6시간이나 떨어진 나라에서 옛 제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 할 때가 왔다.

“Are you married?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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