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성 고공 시위 노동자 '강주룡'의 이야기
지난 5월 25일 한국사 능력 시험에 응시했다. 6.25 전쟁 해설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사에 무지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터라 호기롭게 올해 3월부터 1급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40강을 다 듣고 기출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의 매년 시험에서 ‘강주룡’이란 이름이 등장했다. 그녀가 살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 시대적 배경을 묻거나 그녀가 힘겹게 오른 ‘을밀대’가 위치한 평양에 관한 문제가 나왔다. 이 여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해서 ‘을밀대 강주룡’을 검색했다. 기와지붕에 앉아 있는 쪽 찐 머리 여성의 사진이 나오는데 그런 곳에 앉아 있는 그녀의 사연에 호기심이 당겼다.
1901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살 때 가난에 쫓겨 서간도 길림성 통화현으로 이주했다. 6년 후 스무 살에 강주룡은 열다섯 살의 ‘최전빈’과 혼인하게 된다. 혼인한 지 1년이 지나자 최전빈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1922년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백광운이 이끄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1중대에 배속되었다. 강주룡도 그를 따라가서 6개월간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지만, 집에 돌아가라는 최전빈의 채근에 하는 수 없이 본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6개월 후, 1923년 10월 10일 최전빈은 세상을 떠났다.
강주룡은 시댁에 최전빈의 죽음을 알렸는데,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아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 여기고 "남편 죽인 년"으로 강주룡을 중국 경찰에 고발했다. 그녀는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지내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시집에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친정으로 돌아온 강주룡은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1925년에 평양으로 갔다.
강주룡은 평양 선교리에 있던 평원 고무공장에 취직했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고무신에 열광하던 때였다. 그야말로 고무신이 떼돈도 벌게 해 주고 사람도 잡던 시대였다. 당시 조선의 여성 노동자는 130도 가마솥 옆, 고무 찌는 냄새를 맡으며 15시간 이상 일했다. 임금 또한 일본 남성 노동자의 4분의 1밖에 안 되고, 40전이었던 고무신보다 싼, 하루 30전을 받았다. 거기다 불량품마다 매긴 벌금과 온갖 욕설, 구타, 일상화된 성희롱을 견뎌야 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고무 공업계는 1930년 5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 고무 공업자 대회를 통해 임금 인하를 결의했다. 이후 8월 7일 5개 고무공장 노동자 1080명의 파업을 시작으로 9일에는 평양 시내 15개 고무공장에 근무하는 1800명이 동맹파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임금은 결국 10% 삭감되었다.
1931년 5월 16일, 평원 고무공장 조선인 사장도 임금 17%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여성 노동자 49명은 5월 17일에 파업을 선언했다. 전해에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던 강주룡은 맨 앞에 서서 파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장 측이 대응하지 않자, 그들은 5월 28일에 '아사 동맹'을 결의하고 단식 투쟁에 나섰다. 이에 사장은 다음 날 새벽, 일제 기마경찰대를 불러 49명의 노동자 전원을 무차별 폭행하고 해고를 통보했다.
공장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포목점에 들어가 무명천을 샀다. 그 길로 을밀대로 간 그녀는 천을 감아 밧줄을 만들어 지붕 위로 가까스로 올라갔다.
을밀대는 고구려 때 축성된 평양성 북성에 있는 누각으로 언덕 벼랑에 11m가량의 축대를 둘러쌓아 올린 건축물로 일제 강점기까지는 평양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고 한다. 날이 밝자 산책 나온 평양시민들을 향해 강주룡은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49명 파업단은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 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 한 몸뚱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대중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내가 배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을밀대 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제23호, 1931년 7월 5일-
한국 최초 여성 고공 시위 노동자 강주룡은 체공녀滯空女(높은 곳에 올라간 여자)라는 별명을 얻고 9시간 만에 강제로 끌려 내려온 뒤 옥중 단식 투쟁으로써 임금삭감을 막았고,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 중 절반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강주룡은 공장에 돌아가지 못했고,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6월 4일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잦은 단식 투쟁으로 쇠약해진 강주룡은 출소 후 두 달 만에 평양 서성리의 빈민굴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31살이었다. 유해는 8월 15일 남녀 노동자 백여 명에 의해 장례를 치른 뒤 평양 서성대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강주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다.
강주룡의 고된 삶을 읽고 을밀대 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며칠째 굶은 상태였고 일제 경찰에게 맞기까지 한 얇디얇은 주룡의 모습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1930년대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다 앗아가고, 영혼까지 말려서 황국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일제의 그 서슬 아래 한 젊은 과부의 노동 운동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그녀는 가혹한 노동조건과 임금삭감에 분노했고 그 분노를 연대와 투쟁이라는 방법으로 실천했다.
해방의 희망이 희미해지던 1931년. 강주룡을 을밀대 위로 이끈 것은 자신 뒤에 오는 노동자들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 싶다는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 믿음이 유신체제의 몰락을 이끌었던 YH 무역, 동일방직, 그리고 전설의 노조 원풍모방의 후배 여성 노동자들을 있게 했다.
강주룡이 떠난 지 9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성 노동자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아직도 불평등과 소외는 만연하고 이 사회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진일보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도 강주룡이 가졌던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져본다. 함께 분노하고 그 분노를 같이 실천할 때 1mm의 겨자씨는 새들이 앉아 쉴 수 있는 푸르른 숲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