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말을 걸 때
“제왕의 학문에서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치에서 지혜롭고 바른 신하를 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율곡 이이 『성학집요』-
『성학집요』는 율곡 이이가 1575년에 저술한 제왕학 교습서로 집필 목적을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율곡은 왕이 신하들과 경연(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 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을 통하여 폭군이 아닌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그러나 경연은커녕 충신의 상소를 찢고 유배까지 보내는 왕들이 허다했다. 거기다 간신들에 둘러싸여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하던 왕과 왕비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조선 26대 왕 고종과 명성황후다.
흥선대원군은 명문가였지만 몰락한 집안 출신의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들여 자신의 섭정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이 성인이 되자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사이는 점점 틀어지고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며 남편인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했다. 고종은 어려서는 아버지 기에 눌려 살았고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잡혀 살았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경계하던 외척 세력을 직접 끌어들여 그 후로 20년 동안 부정부패로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렸다.
1881년에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졌다.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 소속 육군 공병 소위를 교관으로 초빙해서 훈련을 시작했다. 별기군은 소총 등 신식무기를 받았을 뿐 아니라, 급료나 피복 지급 등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반면에 구식 군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 달 치의 급료를 받았으나, 쌀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다. 구식 군인들은 폭발했고 임오군란(1882년 고종 19년)이 터졌다.
임오군란은 별기군에 대한 구식 군대의 불만이 원인인 것 같지만, 실은 권력자에 대한 분노였다. 민 씨 일가들이 빼돌린 구식 군인들의 봉급미만 해도 10만 석 이상이었다. 그러나 민 씨 일가는 월급을 달라고 항의하는 군인들을 끌고 가서 혹독하게 고문했다. 구식 군대는 흥선대원군과 함께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여겼던 명성황후를 찾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었지만, 그녀는 측근에게 업혀 충주까지 도망갔다.
충주 은신처에서 숨죽이며 지내고 있을 무렵 어떤 무녀가 명성황후를 찾아온다. 찾아온 무녀는 자신이 모시는 신령이 명성황후가 여기 있다고 알려줬다는 말과 함께 자신을 만났으니 50일 이내에 환궁할 수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려준다. 놀랍게도 무녀의 예언대로 명성황후는 50여 일 만에 궁궐로 다시 돌아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환궁하는 명성황후 옆에는 그 무녀가 있었다. 고종은 왕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지낼 때 큰 힘이 되어준 무녀에게 ‘진실로 영험하다’라는 뜻의 ‘진령군 眞靈君’이라는 군호 君號를 하사한다. 군 君이라는 것은 임금이 왕자, 종친, 훈신을 군으로 봉할 때 내리던 칭호로 천민 출신인 무당에게 군호를 내린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해서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고 구식 군대를 정리한다.
진령군은 고종 부부의 엄청난 총애를 받으며 정치 문제에 개입한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으니, 진령군은 특히 인사권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정의 고위 관료 중 몇몇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거나 의자義子가 되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고종 뒤에는 명성황후가 있고 명성황후 뒤엔 진령군이 있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명성황후는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에 더 매달린다. 진령군은 굿으로도 모자라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치게 했다. 또한,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을 보고 굿판도 벌였다. 또 진령군은 조선을 위한 굿도 잊지 않았는데 수백 석의 하얀 잿밥을 강물에 바쳤다. 이를 본 굶주린 백성들은 그 잿밥을 먹고자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진령군 때문에 국가의 질서가 무너지자,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안효제 등 신하와 선비들이 상소문을 올렸으나 오히려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도승지는 밀려드는 상소를 임금의 격노가 두려워 감히 올리지도 못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들여 그녀가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주었다. 신분제 폐지, 과부 재가 허용, 토지 개혁을 외친 자신의 백성인 동학 농민을 외세를 끌어들여 몰살시킨 명성황후는 그다음 해인 을미년 8월 일본인들 손에 잔인하게 시해되고 진령군의 시대도 끝을 맺는다.
진실로 영험하다고 찬사를 받던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나라를 외세에 의해 도륙의 현장으로 만들어 일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미래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용한 무당이 아닌 그저 불안한 영혼을 가진 인간에 들러붙어 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이었다.
인간이 불안한 것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영토를 보존하고,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대통령의 불안은 국민보다 더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능한 관료를 등용시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논의해야 한다. 대통령이 ‘유능한 참모’ 외에 가까이해야 할 것은 바로 ‘역사’다. 대통령 자신과 나라의 운명에 관해 역사보다 더 완벽하게 풀이해 줄 해설서가 있겠는가. 역사 대신 법사와 도사에게 위안을 받는 지도자는 국민에게 외면당하고 국가의 기운 또한 쇠락할 것이다. 대통령이 역사와 국민의 뜻을 간과한다면 또 다른 진령군은 다시 돌아올 것이며 망국의 굿판은 넘실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