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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Sep 23. 2024

나의 여름, 말레이시아1

청춘의 조각 이야기

 나의 영어 닉네임은 니키타다. 이 이름은 21살 때 처음 영어학원에서 지었다. 프랑스 감독 ‘뤽 베송Luc Besson’의 1990년 영화 ‘니키타’의 주인공인 정부 비밀 살인 병기 니키타를 따라 지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를 니키타로 부르는 친구들에 관한 것이다.      


 2003년 11월 나는 말레이시아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한국에서 ELS 어학원과 숙소까지 예약을 마치고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학원과 기숙사가 있는 곳은 페탈링 자야Petaling Jaya라는 곳으로 수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에서 택시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수업은 문법 2시간, 읽기·쓰기 2시간, 회화 1시간으로 거의 4시쯤 끝났다. 선생님들은 인도계와 중국계 반반이었고 레벨 별로 원어민이 한 명씩 있었다. 

 그중 화교 문법 선생님 ‘도로시’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150cm 초반의 작고 깡마른 그녀는 말레이시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하얀 피부의 소유자였다. 처음엔 심한 멩글리쉬(말레이시아 톤의 영어) 억양과 빠른 말투로 도무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를 만나면 어깨동무한 채 도로시의 말투를 흉내 내며 놀려댔다.

 점차 도로시의 멩글리쉬에 적응하게 되자 그녀의 지치지 않는 선교 활동으로 학생들은 갈등에 휩싸였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만약 교회에 안 가면 퀴즈 점수를 짜게 준다 카더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물론 헛소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 예배가 영어로 진행되는 바람에 늘 꿀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점심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도로시가 일요일 아침마다 숙소에 데리러 오다가 ‘신시아, 토마스’라는 40대 중국인 부부가 나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신시아 아줌마는 나를 만나면 아주 우렁찬 쇳소리로 “니끼따~!”라고 불렀다. 토마스 아저씨는 IT 회사에 근무하며 탈모로 가발을 썼는데 그 덕에 가발 모델까지 겸했다. 그 부부의 국제학생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차량 픽업은 물론이고 집에 학생들을 자주 초대해서 말레이시아 음식을 대접했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학생을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호의를 의심했다. 바라는 것 없이 국제학생들을 챙기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끝끝내 그들의 본색을 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국제학생들이 많아지자 신시아 토마스 부부는 나보다 4살 어린 ‘슈밍’이라는 예쁜 약사 아가씨에게 나를 맡겼다. 

 점차 나는 교회에 가지 않고 슈밍과 어울려 지냈다. 작은 키에 왕눈이 슈밍은 웃음이 많았다. 어땔 땐 내가 숨만 쉬어도 웃는 것 같았다. 자취하고 있던 그녀의 집에서 주말이면 자주 죽치고 있었는데 주말에 먹을 요량으로 마트에서 장을 한가득 봐서 그녀의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슈밍 차 안에서 팝송을 크게 틀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물론 창문을 열고서. 

  학원을 마치고 슈밍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그녀는 라틴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됐다고 했다. 나는 눈치 없이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학원 원장은 나와 나이가 같은 ‘아이비’였다. 그날 수업 후 우리 셋은 저녁을 함께 먹었고 수다는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날 이후 슈밍 보다 아이비와 더 붙어 다녔다. 아이비는 이효리를 닮았고 육감적인 몸매의 전 말레이시아 댄스 스포츠 챔피언이었다. 그녀는 그런 몸매를 감추지 않고 최소한의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젊음을 발산했다. 아이비는 선수 시절 남자 파트너가 바뀌면 매번 사랑에 빠졌다. 정유회사를 운영하는 부자 아버지 덕분에 BMW를 몰고 다니던 아이비는 말라카, 페낭 그리고 포트 딕슨으로 나를 데려갔다. 우리가 도착한 그곳엔 늘 그녀의 전 남자 친구가 있었다.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남자 친구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아이비와 수다를 떨다 보면 영어라는 언어를 잊을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영어로 대화했지만, 한국말도, 영어도 아닌 제3의 언어로 소통한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그녀와 대화하다 보면 나와 같은 영혼이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7개월이란 시간은 흘러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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