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아 토마스 부부가 공항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아이비는 기숙사에 내가 귀여워하던 두 조카와 함께 왔다. 그녀는 내게 가르쳐 주었던 등려군의 ‘첨밀밀’을 카 오디오로 크게 틀어 노래를 불러주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아이비는 곧 다시 만나자고 울었지만, 나는 남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영혼이 아직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오지 않은 느낌으로 한동안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2006년 나의 결혼식에 신시아 토마스 부부가 왔다. 국제학생들의 대모, 대부답게 그들이 온다는 소식에 한국 유학생들은 구름떼처럼 내 결혼식에 몰려들었다. 우리 부부는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도, 딸아이의 다섯 살 첫 해외여행에도 말레이시아를 택했다.
올해 1월 남편과 술을 마시다 신시아 아줌마와 톡을 나누게 되었는데 놀러 오라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취중 항공권 예약을 질러버렸다. 까마득해서 오지 않을 것 같던 8월이 왔고 9년 만에 그들을 만나러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오후 4시쯤 도착해서 말레이시아 음식점에 들어갔다. 향신채 향이 강한 치킨 누들 국물을 한 입 먹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났다.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밥을 먹으며 유심칩을 끼우니 어디냐고 묻는 친구들의 톡이 쏟아졌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토요일은 점심때 신시아 토마스 부부를 만난 후 교회에 가서 도로시와 슈밍을 보고, 일요일에는 아이비가 우리 가족이 묵는 호텔로 와주기로 했다.
토마스 아저씨는 정년퇴직 후 화초와 모터바이크에 빠져있었고, 전업주부였던 신시아 아줌마는 화교 자녀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아들이 결혼해서 딸아이를 낳아서 그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교회에 가니 골드 미스 도로시가 와락 껴안는다. 그녀는 여전했다. 말이 빨라 알아듣지 못해 계속 되물어야 했지만, 어깨동무한 채 그녀를 놀릴 수 있어서 좋았다. 예배가 끝나고 다른 교회에 다니는 슈밍을 만나러 우리는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슈밍은 노산의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10년 전 약사를 그만두고 보험 설계사로 변신해서 판매 여왕이 되었고 네 살 연하의 교회 총각과 마흔 살에 결혼해서 3년 뒤 첫아들을, 올해 46살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슈밍의 어린 아들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헤어지면서 신시아, 도로시, 슈밍은 나를 둘러싸고 기도를 해주었다. 처음엔 감동의 눈물이 나더니 사람 많은 쇼핑몰 한가운데 서서 심각하게 기도해주는 그들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신시아 아줌마는 다른 날 또 만나자고 야단이고, 도로시는 나보고 연락을 너무 안 한다며 눈을 흘겼으며, 슈밍은 내가 아이비만 좋아한다며 투덜댔다. 우리를 태울 그랩 택시가 왔다. 그들은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다음날 오후 1시 스콜이 쏟아지는 가운데 아이비가 17살 딸 엘리스와 작은 경차를 타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사실 아이비는 아들이 3살, 딸이 2살 때 이혼했다. 2007년 아이비는 댄스 학원 수강생으로 만난 전남편(우리 부부는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과 사이에서 덜컥 임신이 되어 급하게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는 심각한 마마보이였다. 신발 사업을 하는 갑부 시어머니는 아이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강제 이혼을 시켰다. 아이들을 뺏길 뻔했지만, 이혼소송 끝에 돈 대신 양육권만 챙겨 전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18살, 17살이 되었다.
딤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아이비의 댄스 학원 ‘쉘 위 댄스’에 들렀다. 예전엔 최신 시설에 빛나던 그곳은 찢어진 소파와 오래된 사진들로 빛이 바래있었다. 2020년 학원을 확장했는데 펜데믹으로 빚을 지고 폐쇄했다며 담담히 얘기했다.
말레이시아에 머무는 동안 정신없이 지나간 이틀과 맨 처음 이 나라를 찾았던 21년 전을 되짚어 봤다. 그동안 니키타는 이제 영어를 하면 머리가 아픈 중년이 되어 말레이시아 친구들과 재회했다. 중국인 친구들은 여전히 끝없는 음식과 사랑으로 나의 위장과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 바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들은 과격하고 까칠하며 불안한 20대의 니키타의 ‘조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자꾸만 말레이시아로 돌아가는 이유는 내 일부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향신료와 매연을 실어나르고, 태양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어도 화내지 않는 사람들의 나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나시르막의 나라. 내가 “트리마카시 (terima kasih,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사마 사마(sama sama, 천만에요)라며 더 기뻐하는 이들의 나라.
말레이시아, 내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