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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an 11. 2024

번역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문학동네, 2018)

“소설은 번역의 결과 자체가 소설로서 읽혀야 하죠. 그런 의미에선 모국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냐는 거죠. (중략) 번역자는 저자의 스타일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우리말을 잘 쓰느냐보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겼느냐 입니다.”(2008.11.28. 「씨네 21」 [김혜리가 만난 사람] ‘번역가 정영목’ 중)


정영목은 1991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으로 출판 번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30여 년간 다양한 영미권 저자의 작품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번역가다. 외국 소설을 좀 읽었다는 독자라면 한번쯤은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로 다수의 소설과 인문분야의 책을 번역했다. <로드>로 제 3회 유영번역상을, <유럽문화사>로 제 53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한 그는 편집자가 ‘믿고 맡기고’ 독자가 ‘믿고 읽는’ ‘역자 정영목’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브리맨>, <미국의 목가>, <제5도살장>등을 옮긴 그는 에세이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문학동네, 2018)을 통해 그동안 번역했던 작가들에 대한 소회와 세상에 대한 시선을 풀어냈다. 


작품의 전면에 포진된 작가에 비해 번역가는 상대적으로 무대 뒤의 스태프에 가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잘되면 작가 덕분이지만 못되면 번역 탓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은 번역자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번역은 번역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칭찬받고 (배우의)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호평을 받는다”는 그의 인터뷰처럼 번역은 ‘분열적’인 직종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번역론은 확고하다. “외국의 어느 작가의 언어와 우리 작가의 언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시도조차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고, 나아가 번역이 그 언어 자원의 테두리 내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번역은 우리말에 상처를 낸다.”(p.307) 그는 상처난 우리말을 아물게 하기 위해 번역가는 모험에 나서게 되고, ‘양쪽 문학의 언어에 새로운 공간’을 열기위해 분투하게 된다고 말한다. 번역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공간을 통해 독자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번역가로서 저자가 통과한 작가들에 대한 글은 그런 다른 세계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필립 로스를 비롯해 주제 사라마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업다이크, 이창래, 알랭 드 보통 등 그가 번역한 작품의 작가들에 대한 글은 친절한 안내서와 같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면밀한 분석과 함께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저자는 필립 로스와 존 밴빌에 대한 애정을 ‘삼각관계’로 표현하고,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창래에 대해 한국인 독자의 선입견을 걱정하며 변론에 힘쓴다. 어떤 쪽으로든 저자의 산문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다보면 소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독자에게도 전해져 온다는 사실이다.


이창래를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작가는 모두 백인 남성 소설가라는 점에 약간의 의구심이 남는다. 정영목이라는 번역가 개인의 의지에 의한 선택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독자들의 편향된 선호도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좀 더 다양성을 확보하고 싶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리스트 업에 불만을 느낄 수도 있겠다. (정영목의 이름으로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마침 최근 발매된 신인 작가 디샤 필리야의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이 흥미를 끈다.) 그러고 보면 작가나 작품명이 아닌, 번역가의 이름으로 책을 검색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선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로 믿음직한 번역가의 선구안에 기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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