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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n 17. 2024

소설을 읽을 때 생각해 볼만 한 것들

서평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민음사 2012)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은 미술, 문학, 음악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인물들을 초청해 그들의 예술론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5년 개설되어 움베르토 에코, 레너드 번스타인, 토니 모리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이 강단에 섰으며, 2008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소설론을 여섯 차례에 걸쳐 강연했다. <소설과 소설가>는 이때의 강의 내용을 묶은 강연록이다. 


튀르키예의 소설가인 오르한 파묵은 195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화가의 꿈을 키웠지만 스물세 살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982년 첫 번째 소설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을 출간했다. 이후 <고요한 집>, <하얀 성>, <검은 책>등의 소설을 발표했고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오스만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비판적 발언으로 인해 파묵은 튀르키예 내에서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p.12)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책은 소설가와 소설의 관계,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 중심부에 대해 전한다. 책의 원제인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는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논문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에서 비롯되었는데, 파묵은 기교나 인위성 없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소박한’ 문학과, 단어와 의미, 인위성 등을 의식하는 ‘성찰적인’ 문학에 대해 분석하며 소설이 주는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에 의하면 독자 또한 소박한 독자와 성찰적인 독자로 나뉠 수 있다. 소설이 곧 작가의 경험담이라고 믿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철저히 계산된 허구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 하지만 파묵은 이 경계에서 비로소 소설의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설 예술은 독자와 작가 간에 허구에 대한 완벽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완전한 상상의 산물도 아니고, 완전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은 독자도 작가도 알고 합의한 것입니다.”(p.41) 소설가가 묘사한 세계를 상상하며 독자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p.57)을 느끼게 된다. 


파묵은 상상력을 통해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독자들이 갖게 되는 자긍심과 소유의 감정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한다. 그는 소설 속의 언어를 통해 독자들이 공유된 감정을 갖게 되고, 박물관의 유물이 전시 보존되는 것처럼 ‘우리 삶에서도 무엇인가는 간직될 것’(p.130)이라는 자긍심과 위로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나만이 그 소설을 이해하고 있다는 차별화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작가는 이러한 독자의 반응을 미리 예상하며 거기에 맞춰 소설을 쓴다는 영업비밀을 밝히기도 한다. 


소설가가 가지게 되는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파묵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소설가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을, 즉 다른 공동체, 인종, 문화, 계층,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바로 그 노력 때문에 정치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치적인 소설은 전혀 정치적 주제나 동기가 없지만,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여, 가장 거대한 전체를 구성하려는 소설입니다.”(p. 139) 1차 세계대전 전후에 있었던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인 학살을 비판했던 파묵은 가난한 비서구 세계의 작가가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를 털어놓는다.


소설의 중심부란 결국 ‘삶에 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이라고 말하는 파묵은 ‘어떤 소설이 종국에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해 주고, 암시해 주고, 보여 주고, 경험하게 한 심오한 어떤 것’(p.156)이라고 결론짓는다. 결국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이며 그를 향한 작가와 독자의 협업인 것이다. 제목은 ‘소설과 소설가’지만 그를 읽는 독자의 입장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풀어낸 이 작품은 파묵의 소설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소설과의 관계적 측면까지도 보여준다.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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