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혀사장의 서고 Dec 19. 2018

뻔뻔하고 능글맞은 <퀴르발 남작의 성>

선물을 받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본인의 돈과 시간을 쏟아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허투루 넘길 수고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책 선물은 더욱 특별하다. 가격이야 다른 것에 비해 그리 부담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무난한 스타벅스 기프티콘과 달리 책은 개개인에게 효용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역학의 이론과 맥락>이라는 책을 선물하면 사주나 명리를 신봉하는 사람인가란 오해를 사는 것과 동시에 목침으로나 쓰이겠으나, 나처럼 보건의료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감사한 선물이 될 것이잖은가. (참고로 부연하면 사주 책이 아니라 질병의 역학을 다룬 책이다.)




차라리 이런 전공서는 좀 낫지, 더 어려운 것은 소설책 추천이다. 전공으로도 짐작하기 힘든 개인의 내밀한 취향을 모르면 쉬이 선물하기도 힘든 분야이니 받는 사람도 읽기 전에는 목침이 될지, 서가를 장식하는 양서가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퀴르발 남작의 성>을 선물해주신 분께 무척이나 감사를 보낸다. 내 취향에 잘 맞는 재밌는 소설이었다.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은 소설가 최제훈의 단편 소설들을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한국 문학에 과문한 탓에 이 책으로 처음 접한 분인데, 여러모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 박형서를 떠올리게 하는 분이셨다. 박형서가 담백하게 본인이 구축한 독특한 세계를 늘어놓는 식이라면, 최제훈은 무척 능글맞고 뻔뻔하게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이다.




예컨대 단편집에 실린 <셜록 홈스의 숨겨진 사건> 같은 것을 살펴보면 이렇다. 소설은 셜록 홈즈가 그의 친구 왓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미스터리한 살인이라 제시하는 사건의 피해자가 '아서 코난도일'이다. 물론 철저하게 셜록 홈즈의 입을 빌려 '본인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도 모른다'는 능청을 떨며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 그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도일을 모른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말이다. 이런 그 특유의 능글맞음과 뻔뻔함이 책에 실린 작품 전반에 잘 녹아있어서, 박형서와는 다른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물론 이것이 그의 유일한 매력은 아니다. 단편집의 제목이자 첫 작품으로 등장하는 <퀴르발 남작의 성>은 일본의 추리소설가 온다 리쿠가 쓴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유사하게, 혹은 박형서의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처럼 가상의 작품인 <퀴르발 남작의 성>을 주제로 해당 작품이 어떻게 해석되고 변형되는지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실제로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작품은 최제훈의 창작으로, 그런 작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소설에 마치 그런 작품이 존재하는 양, 특유의 뻔뻔함과 능글맞음을 섞어 그 작품의 영화화 과정과 리메이크, 그리고 대학에서의 강의를 꾸며낸다. 게다가 인간의 행동 기제에 대한 깊숙한 이해가 곁들여져,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은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흐른다. 여러모로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먹물 냄새가 너무 진하게 풍기는 작품들, 예컨대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관한 고찰> 같은 작품은 익숙한 소재의 이면에 있는 다른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창의적인 면이 있지만 그게 소설로서 재미가 있는지는 좀 의문이다. 박형서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이쪽은 문학 비평 자체를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측면이 강한 풍자 소설이라 동급으로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이건 박형서의 위대함으로 봐야 할까?




문제는 또 있다. 책을 읽는 나는 <셜록 홈즈>라던가 <프랑켄슈타인>을 재밌게 읽었기에 이해에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독자의 기존 독서 경험에 의존한 2차 창작들이 너무 많다 보니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모르는 이들이 읽었을 때 과연 나와 동일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좀 의문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북극에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원작을 전복적으로 해석한 작품이 왜 전복적인 재미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이런 몇몇 단점을 고려하더라도, 나름대로 재밌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인적 별점은 ★★★☆.


작가의 이전글 섬세해서 섬세하지 못한, <도어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