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의 평가와 칭찬이 불쾌한 이유
최근 어느 소설가가 세월호 희생자를 소재로 쓴 소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대목을 일부 옮겨오면 이렇습니다.
지금쯤 땅 위에선 자두가 한창일 텐데, 엄마와 함께 갔던 대형마트 과일 코너의 커다란 소쿠리에 수북이 담겨있던 검붉은 자두를 떠올리자 갑자기 입속에서 침이 괸다. 신 과일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 성화에 엄마는 눈을 흘기면서도 박스째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오곤 했는데….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콤하고 달콤한 즙액
강동수 저, <언더 더 씨> 중 일부 발췌
여기서 화자로 설정된 세월호 희생자의 젖가슴을 과일인 ‘자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인데, 작년 9월에 출판된 책임에도 뒤늦게 해당 대목이 알려져 논란이 일어난 것이죠.
저자는 이에 대해 ‘생기발랄하고 젊은 여고생의 생을 상징하고자 했다’는 황당한 해명을 했습니다. 본인은 칭송을 한 것이지 성적 대상화를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출판사는 한 술 더 떠서 독자들의 문해력을 탓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가 도리어 역풍을 맞았고, 결국 애초의 입장문을 지웠습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한국스러운 풍경이지만, 저는 이 논란을 보며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2017년에 개봉해 깜짝 흥행을 이뤘던 공포영화 <겟 아웃>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 아래에는 영화 <겟 아웃>의 스포일러가 일부 존재합니다.
흑인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시선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아 왔었습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사육을 당했었고, 노예해방 이후에는 낮은 교육 수준과 사회적 차별로 인하여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회경제적 하층민의 지위를 쭈욱 유지 해왔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미국 슬럼가에는 흑인이 가득하고, 미국 교도소에서 가장 많이 수감된 인종도 흑인입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흑인’이라고 하면 저학력과 저소득 혹은 범죄라는 부정적 스테레오 타입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죠. 유명 흑인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비싼 차를 몰고 가다가 차량 절도범으로 오인받아 불심검문을 당했다는 개그는 실은 슬픈 다큐인 셈입니다.
물론 어느 사회건 차별받는 집단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시선은 좀 특이합니다. 이들에게는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일반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는 집단은 한없이 나쁜 점들만 부각되는 편인데(한국의 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흑인들은 도리어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긍정적 대상으로 인식되거든요. 뛰어난 운동 신경, 음악적 재능, 그리고 큰 생식기에 대한 찬미까지. 이런 문화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처 ‘흑형’이라는 우호적 호칭으로 이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어찌 됐건 긍정적 이미지니 좋은 것 아니냐 구요? 그런 인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영화가 바로 <겟 아웃>입니다.
쇼윈도에 진열된 흑인
영화 <겟 아웃>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교제하다가, 그 집으로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간 과정을 스릴러화한 일종의 블랙 코미디입니다. 물론 영화 자체는 호러물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블랙 코미디에 더 가깝거든요. 국내에서는 ‘흑인’에 대한 미국 내의 스테레오 타입들을 경험할 일이 거의 없으니 그 부분이 잘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미국에서는 영화를 관람하러 온 흑인들이 다른 인종의 관객들은 웃지 않는 포인트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던 이유는, 영화에서 본인들이 자주 겪던 흑인에 대한 긍정적인 편견을 지속적으로 부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여자 친구인 ‘로즈’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한 백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크리스는 아미티지 집안의 예비 사위로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는데, 정작 집에 도착해서는 이상한 위화감을 많이 느낍니다. 그를 처음 만난 예비 장인은 “나는 계속 오바마 대통령을 뽑았었다”며 본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님을 어색하게 어필하질 않나, 하필 그의 방문 기간에 아미티지 저택을 방문한 부유한 백인 남성들은 죄다 그를 보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요즘은 흑인이 유행”이라거나, 몸을 만지며 “굉장히 탄탄하다”며 그를 치켜세우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말 흑인이랑 하면 정말 다르냐”는 질문을 순수하고 친근한 얼굴로 내뱉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흑인에 대한 멸칭인 깜둥이(Nigger) 같은 말을 쓴 것도 아니고, 겉으로는 분명 칭찬의 형태를 띠고 있는 말들을 뱉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선의로 했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은 상대를 본인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구분되는 타자이자 쉬이 평가될 수 있는 일종의 ‘상품’으로 취급을 했으니까 나타나는 일이거든요. 그렇기에 영화를 보던 흑인 관객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멸적인 방식의 차별이 아니라, 선의로 포장되었지만 쇼윈도에 갇혀서 품평을 당하는 것과 다름없는 방식의 차별을 영화가 무척이나 충실히 재현을 했으니까요.
스릴러 같은 블랙코미디의 탄생
정말 재밌는 건 지금부터입니다. 조던 필 감독은 흑인들을 마치 상품인 양 품평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실제로 그들이 흑인의 신체를 원하는 것으로 바꿔버림으로써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했거든요. 아미티지가를 방문한 부유한 백인들은 겉으로는 꽤나 교양이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흑인을 멸시하기보단 흑인의 우월함으로 꼽히는 것들을 칭찬하는 선의를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이들의 실체는, 흑인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악마 같은 인간들이었습니다. 교양 있는 이들이 겉으로 내뱉던 선의의 칭찬들은, 실제로는 좋은 가축을 고르기 위해 꼼꼼히 살펴보고 코멘트를 하는 현명한 소비자들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이런 사실이 점차 밝혀지며 영화의 긴장은 고조되어 가고, 스릴러와 호러 장르의 문법으로 잘 버무린 영화는 영화의 끝까지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급박한 전개로 힘차게 달려갑니다. 점차 커져가는 불안과 기이한 공포감이 맞물리며 진행되다 보니, 공포영화라는 기존 장르로만 보더라도 꽤나 잘 만들어졌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거기다 블랙코미디적 성격을 짙게 가지고 있으니 정말 무척이나 매력적인 공포영화가 됐습니다. 덕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각본상을 수상했고, 2년 전 작품임에도 아직도 종종 회자가 되고 있죠.
이렇듯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체의 평가를 원치 않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불쾌하긴 마찬가집니다. 진열대에 올라가 밤일을 잘하겠다느니, 피부가 너무 좋다느니, 몸이 탄탄하다느니 하는 ‘칭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유쾌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건 상대를 실제로 존중한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을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그런 선의의 칭찬은 마치 나를 상품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감독의 날카로운 지적. 주인공인 크리스가 받는 그 끈적끈적하고 묘한 욕망이 섞인 눈빛은 관객에게도 그런 위치에 서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선사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그럴 일이 자주 없는 남성도 진열대에 오르면 저런 느낌을 받을진대, 여고생의 젊음과 탄력을 칭송하기 위해서 ‘과즙이 흘러나오는 탄탄한 자두와 같은 젖가슴’이라는 칭찬을 한다니, 이게 과연 선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세월호 참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가 스스로의 육체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주장 앞에선 정말 아연실색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허구의 화자라지만, 누가 봐도 젊은 여성의 육체를 상품으로써 소비하고자 하는 중년 남성의 음험한 시선으로 읽어낸 여고생의 몸을 두고 화자 스스로의 회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편다니. 그에게 과연 문학적 재능이 존재하는지 심각한 의구심이 듭니다. 그에게 자신 있게 이 영화를 권해봅니다. 보고 나면 생각이 좀 바뀌시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