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박기

좋은거구나.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마주한다는 건

by 김상혁

-쌈채소 농장에서 돈을 받지 않고 일하며 지낸 4개월. 그 후 나는 광천에 집을 구해 시골교회를 다니며 생활했다. 유기농 쌈채소 농장의 환경 속에서 겪은 고양감이 다 지나간 뒤, 나는 내가 처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현실에 대한 내면의 비판들과 싸우고 있었다-



실은 약간 내 스스로가 부끄럽다. 내 현재 상황에 대해 평탄하게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있다.

내가 정말 엄마 돈 아빠 돈 덕을 보고 있으면서, 나 자신을 평온하다고 평가할 자격이나 있는걸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돈 없어도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왜 나는 그걸 거부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버리는가? 하는 자책감도 든다.

가끔은 내가 그냥 처절한 패배자 같다. 서울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멀리 시골로 내려가 거기서도 막상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못난이 같이 느껴진다.

새로운 또래들과 사회성 좋게 뭔가를 함께 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속으로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니까 나는 내 할 일을 하는거야'라고 자기합리화를 씨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실은 심각하게 열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열등감이 피어난다.

그냥 결국 나는 가족들을 축내는 존재가 아닌가. 아직도 제대로 사람 구실 못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지하려고 혈안이 된 한심한 놈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위와 같은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잣대가 항상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그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자동반응이 나의 삶이었다. 삶은 마치, 현재도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오로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현재완료진행만이 전부같이 느껴졌다. 삶이 공중에 둥둥 떠있는, 그렇다고 과거랑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평탄하게 미래로 이어지지도 않는 작은 나무 막대기 같았다.


나는 큰 나무가 되고싶나보다. 사랑하는 가족으로 더 스며들고, 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나를 받쳐주는 든든한 땅을 디딛고, 내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양분들을 될 수 있으면 다 흡수하고, 척박한 땅을 떠나 좋은 땅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정말 내 씨앗이 단단히 감추고 있었던, 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왔기 때문에 피어낼 수 있는 꽃과 나무를 저 하늘 높이 피어내고 싶은 건데. 깊이 뿌리를 박아 오롯이 하늘을 바라봤을 때 하늘에서 퍼붓는 햇빛을 받아 나는 저절로 자라날 것인데. 그 큰 나무가 되고 싶은 나의 마음은 되려 깊이 뿌리박는 일을 한심하게 생각하게 한다.

더 큰 나무가 되어야겠다. 더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한다. 모든 부정적 생각들을 전복시켜야 한다.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큰 나무가 되어 나를 지지해주고 나에게 양분이 된 모든 것들에게 그늘을 주고 양분을 되돌려주고 생명의 에너지로 넘치게 해주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야겠다. 나무 막대기로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깊이 뿌리를 박아, 더 높게 펼쳐진 나무가 되기 위해선 말이다. 더 훨씬 큰 나무가 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다.


내려놓기. 서울에서 놀러 온 두 친구와 내가 사는 시골의 산장에 갔던 적이 있다. 그 때 나방이 갑자기 방에 들어왔는데, 애들은 그 나방에 신경이 뺏겨 그 나방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에 혈안이 되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저렇게 신경쓰지? 저건 그냥 나방인데'

2022년 부터는 여름이 되어도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더운 건 맞다. 온도가 높고 습도가 높다. 근데 그래도 '아 왜이렇게 더운거야'하고 짜증이 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려놓다 보면, 내게 주어지는 현실을 그냥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임과 수용. 마치, 工 라는 한자가 내 안으로 수용되다가 말면 짜증이 난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빼내야 하는건지 숙 깊이 박아버려야 하는건지 갈등하게 되면서 긴장이 생긴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나방이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들어와버린다. 여름의 무더위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와 버린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 마치 내 눈에 보이는 바닥 타일 무늬와 같은 자극이 된다. 다만 내가 선택하는 것은 그것에 집중할지 말지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에 감사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받아들인 모든 것들은 감사라는 필터를 통해 또 한 번 내 안에서 걸러진다.


뿌리박기. 그렇게 감사라는 필터를 거친 工 들은 이제 내 안에 뿌리박기 시작한다. 따라서 내려놓는 과정은 어쩌면 감사라는 필터도 거치지 않고 내가 아무렇게나 뿌리박아놓은 것들을 다 뽑아버리는 것을 포괄한다. 감사할 필요 없고, 아직 감사하지 않은 것들, 심지어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도 내 안에 깊이 박혀있기도 하다. 그것들이 마치 땅 속에 버려진 플라스틱 사탕껍질처럼, 내가 온전히 감사해서 내 안에 깊숙히 뿌리박아야 하는 것들에 툭 툭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뿌리박기를 주저한다. 수용까지 하고, 감사까지 한 것들이 힘을 잃기 시작한다. 그럼 내 내면의 땅은 더 플라스틱 쓰레기들에 노출되기 좋은 땅으로 다시 변한다. 따라서 툭툭 걸릴 때마다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박아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흙 밖으로 내몰아야 하겠다.


좋은거구나.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마주한다는 건 말이다. 기회다. 이렇게 결점과 빈자리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말이다. 좋은 것이 그것들이 아직 잔재물로 남아있는 자리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혼자 움막을 파고 살아있는 외지인들을 마주친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싸워야 한다. 그들을 때려눕히건, 그들을 회유하건, 그들을 매수해서라도 뿌리가 제 자리를 찾아가 끝까지 나아가게 해야한다.


나는 더 가라앉는다. 내 숨은 폐의 중간 쯤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폐의 깊숙한 바닥을 찍는다. 숨을 위 아래로 드나들게 하지 않고 딱 그 중앙 자리에 유지시키기 위해 바짝 힘을 주고 있던 어깨와 머리의 힘은 빠진다. 그렇게 가라앉은 중력으로 인해 마땅히 내 안으로 더 깊이 박혀야할 뿌리들은 더 아래로 나아간다.

또 새롭게 마주할 것이다. 더 깊이 박혀져 있었던 플라스틱 조각들, 쇳조각들, 유리 파편들. 끝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바닥은 나왔다. 내려놓으면 내려놓을 수록 끝없는 허공이 나오지 않았고, 언젠가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바닥이 나왔다. 따라서 오염된 영역 또한 언젠가 다 지나갈 것이다. 남은건 말랑말랑하고 끈적하게. 뿌리가 더 수월하게 박힐 수 있도록. 그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더 단단히 퍼진다면. 계속해서 내 마음을 침범하는 오염물질들이 머지 않아 저절로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외부에서 받은 모든 좋은 양분들을 끝까지 흡수한 결과 뿌리는 더 너른 면적으로, 더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양분을 취할 수 있는 내 내면의 새로운 세계에 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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