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내 안에는 살아오면서 생겨난 여러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물음표를 매달고 가라앉아 있다. 나의 질문들은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과 딱 어울리는 문장을 만나면 부지불식간에 번쩍하고 떠올라 문장과 손을 잡고 매달린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스물을 갓 넘긴 어느 해.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어른의 연애를 시작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제대로 된 연애의 경험이 없었던지라 그 친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 한동안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되어 주었다. 참 잘 생긴 남자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요란한 연애를 했는데 1년 조금 지난 어느 날 그들에게도 이별이 찾아와 버렸다. 그녀도 보통의 청춘들처럼 눈물을 흘렸고, 술을 마셨고, 충분히 아파하며 실연의 의식들을 빠짐없이 골고루 이행했다. 그때 쏟아낸 말들 중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강한 여운을 가진 말이 있었다.
“그와 만날 땐 그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었는데 헤어지고 보니 행복이라고 느꼈던 그 시간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어.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처럼 허무해.”
‘연애란 그런 것인가? 정말 헤어지고 나면 상대와 함께 나눈 모든 시간과 추억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상처만 남게 되는 그런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고 끝이 남기고 갈 허무가 두려워 창창한 20대를 사랑하지 않고, 연애하지 않고 관계 맺기를 망설여야 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데. 그렇다면 도대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무의미를 반복해야 결말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을 만나게 될 수 있을까를 헤아려 보면서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버렸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 물음표들을 느낌표로 바꾸어주었다.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은 듯 환해질 거야. 모든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발자국 소리를 나는 듣게 될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나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밀은, 금빛이어서,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래서 나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고....』
인간은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은 서로를 길들이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면서 시작된다. 처음 만날 때는 알 수 없다. 상대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될지 아니면 그저 한 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 일지. 처음엔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와 어느새 바로 옆에 앉아있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없었을 때가 잘 생각나지 않으면 관계가 깊어졌다는 뜻이다. 서로에게 길들여지면 여우가 어린 왕자의 머리색과 닮은 밀밭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처럼 나의 세계에서 지금까지 흑백으로 존재했던 여러 가지 것들이 색을 입고 빛을 발하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사랑은 이별이든, 죽음이든 필연적인 슬픔을 내포하고 있으니 영원히 행복할 수만은 없다. 사랑으로 행복했다면 언젠가는 그 사랑을 상실한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아무리 예견된 고통이라고 해도 직접 맞닥뜨리면 생각보다 통증이 강력해서 휘청거리게 되고 한 번 두 번 겪다 보면 두려워진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보여서 회의가 생긴다. ‘결국 똑같을 거야. 남는 건 상처뿐일 거야.’라고. 20년 전 친구의 말처럼.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가 말했다.
‘아!...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난 너를 조금도 괴롭히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해서.....’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럼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얻은 게 있지. 저 밀 색깔이 있으니까.’』
‘얻은 게 있지. 저 밀 색깔이 있으니까’ 이 문장이 20년 전 내 안에 가라앉은 질문 하나를 끌어올렸다. 어린 왕자와의 이별을 마주한 여우의 말이다. 이별은 슬프지만 밀을 볼 때마다 너를 닮은 밀밭의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그러니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틀렸다.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린 건 아닌 거다. 상처만 남을까 두려워 사랑을 그리고 관계 맺기를 망설이지 말라는 거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던 고집스런 의문 하나가 기분 좋게 나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