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마음이 팔랑팔랑해지는 달이다. 목적 없이 이유도 없이 성급하게 떨어지는 벚꽃 마냥 어지럽고 분주하다. 뭔가를 하고 싶긴 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고 어디를 가고 싶기도 한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그저 어쩌고 싶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상태의 들뜸이 나를 부추긴다. 그런데 이 소란스러운 울렁거림이 그저 나만의 병증은 아니었나 보다. SNS 피드에 다양한 테마의 여행지 소개, 가볼만한 숙소 추천, 맛집에 카페까지 이제 슬슬 놀러 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허파에 바람 넣는 정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중에서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인 숙소 사진이 있어 무시하지 못하고 들어가 보고 말았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남해의 펜션은 외관부터 실내 인테리어까지 하나의 예술 작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홀린 듯 예약 버튼을 눌렀는데 펜션의 아름다움 보다 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이제 3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올해의 예약은 모두 끝이 나고 내년 1월의 예약을 10월에 오픈한다는 안내창이 떴다. 예약 표시 달력에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모든 날짜에 빨간색의 '예약 완료' 도장이 찍혀있었다. 1년 후의 시간을 미리 계획하는 부지런함 정도는 있어야 편백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바다를 바라볼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
예약 달력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주말은 그렇다 치고 무수한 평일의 '예약 완료'는 어떤 의미인가 싶었다. 무려 1년 전에 예약되었을 그 평범한 날들의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하려면 할 수는 있겠다. 개인 교습소는 모든 것이 나의 결정에 달려있으니 '다음 주 수업은 쉽니다.'라고 공지하고 놀러 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야 하는 게 1인 교습소의 사정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해버리면 나를 대신해서 뒷갈망을 해줄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가고 싶은 곳이 생길 때마다 '다음 주 수업은 쉽니다.'를 써먹었다간 한 주가 아니라 영영 쉬게 될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즐길 수 있을 뿐 그 가능성은 그림의 떡 같은 것이다.
일을 하지 않는 삶은 어떨까? 아니, 일을 하지 않는 삶이 궁금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일하지 않는 삶을 꿈꾸지는 않는다. 기회만 닿는다면 이것저것 경험해보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다만 '돈과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인생은 어떨까'가 궁금하다. 삶에서 한순간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혼자 살고 있는 지금은 나의 생계를 온전히 스스로 책임져야 하므로 말할 것도 없이 돈이 중요하다. 스물넷부터 시작한 경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고 그렇게 번 돈으로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러니 돈과 상관없는 선택이라는 것은 애초에 내 인생의 선택지에는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누군가가 내 인생의 답안지에 '돈 걱정 없이 일하기' 옵션을 지워버렸던 건 아닌 것 같다. 나의 인생에서 일을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20년 동안 그 사실을 의심조차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던 범인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니었나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돈을 제쳐두고 생각해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주머니에 돈이 부족하다고 상상력까지 빈한할 필요는 없는데 오랜 세월 하던 일만 계속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이 부족해서 펼쳐 놓는 상상들도 뻔하다. 예쁜 카페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옷가지를 팔아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말할 것도 없이 글을 잘 써서 팔아보고 싶은 소망도 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지금 당장 시작하지 못할 일이 있나 싶다. 그동안 닦아 놓은 편한 길이 있으니 굳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새로운 일을 선택하지 않을 뿐이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이러니 나를 돈 버는 일에 가둔 것이 다름 아닌 나라고 할 수밖에. 돈이 많아야지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은 궁색한 핑계에 불과했다. 돈으로부터의 자유는 돈을 생각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가난해서 돈 버는 일을 꼭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단 그게 편하니까 하고 있는 것이면서 엄살 부리지 말아야겠다. 못 선택하는 게 아니라 안 선택한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말아야겠다.
돈벌이를 위한 일로 치부되어 버려 미안할 만큼 지금의 내 일을 사랑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도 당장 내던지지 않는 건 이 일을 많이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해도 이 일은 나를 찾아주는 이가 없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일이 돈 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아이들을 만나는 이 일을 평생 하고 싶다. 종종 '다음 주 수업은 쉽니다.'를 써먹어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