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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Jul 02. 2022

그날의 자유로움이 가장 좋았어 승희야

우리 5월에 실컷 놀아두길 잘했다. 6월 중순부터 슬슬 시작되더니 마지막 일주일은 정말 정신없이 바빴어. 너도 그랬겠지. 학생들 시험 기간엔 어쩔 수가 없다 그지? 몇 달 동안 매일 성실하게 공부했는데도 시험 날짜가 다가왔을 때 왜 느긋할 수 없는 걸까? ‘이제 다 됐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해서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싶은데 그게 참 안돼. 하루 전날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푼다고 시험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는 데까지 더 해보고 싶은 욕심에 학생도 나도 녹초가 되었다. 시험 하루 전날에는 몇 시간 동안을 앉지도 못하고 교실 이곳저곳 돌면서 문제를 풀었더니 다음 날 목이랑 허리가 다 아프더라. 애들이 시험을 보는 건지 내가 시험을 보는 건지 참. 막상 시험 보는 날엔 아이들이 학원을 오지 않으니까 그날 하루 잘 쉬면서 충전을 해야지. 시험을 잘 봤는지 걱정도 되고 아무도 소식이 없으면 이미 그 자체로 소식이니까 마음 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쉬자 싶어서 실컷 놀았다. 아이들과 함께 시험공부하느라 수고한 나에게 반팔 티셔츠도 하나 사줬어. 역시 피곤을 달래고 원기를 회복하는 데는 쇼핑이 즉효약이야. 바로 쌩쌩해졌어.      


일도 일이지만 6월엔 우리에게 소소하게 많은 일들이 있었네. 작년 11월부터 읽기 시작해서 무려 7개월 동안 함께 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드디어 끝냈어. 프루스트와의 프랑스 여행을 끝내고 이번엔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만났잖아. 친구들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습지 여행도 했어. 한동안 멈추었던 글쓰기 작업을 다시 시작한 것도 의미가 있었고. 우리 6월 한 달, 참 열심히 살았다 그지? 뭘 하고 살았나 하고 하나씩 나열하다 보니 열심히 지낸 것 같아 새삼 뿌듯하다. 그중에서 7개월 동안의 대장정을 끝낸 기념으로 책거리 삼아 다녀온 사유원 소풍이 단연 가장 인상적인 6월의 기록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에 대학 선후배 5명이 빨간다방 독서모임을 하고 있었잖아. 그때 각자 한 분야씩을 맡아서 책을 정했었는데 네가 승효상 건축가의<보이지 않은 건축, 움직이는 도시>라는 책을 골랐어. 덕분에 건축 분야의 책을 처음 읽어보게 되었는데 첫 장을 읽을 때의 두근거림이 지금도 생생해. 그 어떤 추측이나 기대 혹은 최소한의 정보조차 없이 책장을 펼친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건축가에 대한 지독한 무지 덕을 봤다고 해야 하나. 건축 이야기 속에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진지하고 깊게 녹아있어서 단번에 홀딱 반해버렸다. 사유를 담고 있는 그릇인 문장들도 단정하고 단호하고 아름다워서 한 문단을 읽자마자 인생책 만났다 싶은 기분이 들더라. 건축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게 해 준 책이었고 그 관심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으로 이어졌어. 그리고 책으로 맺은 인연이 자연스럽게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이 있는 사유원으로 나를 이끌었고.     


좋은 건축과 건강한 도시는 우리 삶의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이 끊임없이 일깨워지고 확인될 수 있는 곳이며, 그것은 비움과 고독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과도한 물신의 탐욕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잃어버렸던 우리의 고독을 다시 찾아 이를 마주하고 우리의 근원을 다시 물을 수 있도록 비워진 곳, 그런 비움의 도시가 결국 우리의 존엄성을 지킨다. ... 도시와 건축의 아름다움은 채움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中 – 승효상>  

        

사유원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어. 공간감이 있는 작품을 영상이나 사진이 아니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경험이 오랜만이었더라. 역시나 직접 가서 경험하는 게 최고인 것 같아. 끝없이 펼쳐진 푸르름, 그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놓인 건축, 자연스럽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던 그 속에 담긴 정신, 재래식 화장실까지도 공간에 머무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온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는 체험이 참 좋았어. 그 공간에서의 시간들이 고요와 감동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주었다는 기분이야. 그날 찍은 사진들을 자주 보거든. 최근 몇 년 동안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었던 날이 없었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정해져 있지 뭐. 좋았으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들이 사진 찍지 않고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언덕을 오르면 들꽃 무성한 꽃밭이 등장하고 또 한 굽이 돌면 모네의 그림 속에 있는 연못이 나타나니까 한 장면도 거를 게 없었잖아. 어쩜 그럴까. 그러니 감탄과 동시에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리고 그 공간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들만큼 그 시간 그곳에서 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담은 사진도 참 좋더라. 혼자서 이쁘게 잘 나온 사진보다는 둘이 함께 찍은 사진에 훨씬 마음이 가더라고. 구도가 삐뚤어지고 얼굴이 못나게 나와도 둘이서 찍은 사진이 더 이쁘더라.      


그날은 하루 종일 들떠있었어. 오랜만에 너랑 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놀러를 간 거였잖아. 옛날에 우리 둘이 한창 자주 놀러 다니던 그 시절의 기분이 났어. 자유로웠어.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네가 하고 싶은 것의 차이가 없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그게 곧 너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자유로움이었어. 희한하지.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면 보통은 배려나 양보를 조금씩은 해야 하잖아. 맞춰야 하는 부분이 있어. 그런데 너랑 놀러를 가면 그런 게 없단 말이야. 예전부터 그랬어. 그래서 우리가 같이 놀러를 그렇게 자주 다니면서도 트러블이 없었고 다음에 또 가고 싶고 그랬던 거야. 다 네 덕분이야. 네가 항상 먼저, 더 많이 베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어. 난 옹졸해서 먼저 베풀지 않고 상대의 베풂을 받은 후에 감사의 마음으로 답례를 하는 정도가 다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너한테 고맙고 미안하고 더 잘해주고 싶고 더 재밌게 해주고 싶고 그래. 재밌게 해 줄게 또 놀러 가자.      


7월엔 아빠 기일이 있는 달이야. 올해부터 날짜 신경 쓰지 않고 7월 첫째 주 토요일에 제사를 지내기로 엄마가 선포하셨어. 지금까지는 날짜대로 제자를 지내왔는데 제삿날이 평일일 때는 언니랑 동생이 창원에서 일 끝나고 늦게 와서 제사 지내고 더 늦은 시간에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신경 쓰인다고 하셨어. 요즘 제사나 차례에 대한 인식들이 많이 변하고 있는 걸 보면서 꼭 그 날짜가 아니어도 되겠다 싶으셨던 것 같아. 토요일로 정하면 겸사겸사 가족 모임 삼아 같이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정하셨더라고. 엄마가 나이가 들어가시니까 이런 의례들을 간소하게 정리하고 싶어 하셔. 예전에는 장남이 제사를 맡아 지내는 게 당연했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 않잖아. 옛날처럼 장남이라고 특별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책임만 떠넘기려니 이치에 안 맞지. 딸들도 다 똑같이 키웠고 딸에게나 아들에게나 같은 부몬데 꼭 아들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차례는 지내지 않기로 결정하셨고 이번엔 아빠 제사 날짜와 형식을 과감하게 바꾸신 거지. 더불어서 제사상 차리는 것도 우리가 알아서 하라고 엄마는 이제 그만하고 싶으시다고 선언하셨어. 지치실 때도 됐지. 내가 열세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엄마는 너무 젊었고 막내 동생은 너무 어렸어. 첫제사 때 열 살도 안 된 막내 동생이 그래도 장남이라고 제주가 되어서 제사상에 술을 따라 올렸어. 어린 남동생 뒤로 누나 셋이 쭉 늘어서서 엄마가 정한 순서에 따라 넷이 함께 절을 했었다. 우린 아빠 제사를 지내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가혹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시작된 아빠 제사가 30년이 됐어. 엄마 참 고생 많으셨지. 이젠 우리가 해야 하는 게 맞네. 사실 안 하던 걸 하려니 마음이 좀 산란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네게 얘기를 하다 보니까 수긍이 되면서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줄었다. 당연히 해야겠구나 하고 받아들여지네. 그냥 제사음식 차려놓고 절하는 거 말고 좀 의미 있게 행할 수 있는 제사는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형식에 집중하면 그저 노동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형식보다는 마음을 담아서 행할 수 있는 방식은 없을까 찾아봐야겠어. 네가 지난번에 얘기해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참고할게.  

   

6월의 노고를 치하하며 자유로운 주말 만끽하자. 여성팀의 서울 여행 즐겁게 하고 사진도 많이 찍어. 오늘 저녁엔 각자의 하늘 아래서 정말 시원한 맥주를 한잔씩 하자. 그러기 좋은 계절이니까 7월은.     

      

2022.7.2. 복숭아 맛 맥주를 좋아하는 은성 씀      


 +에필로그+

편지를 쓰다가 이런 일이 있었어.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손톱이 살짝 거슬리는 거야. 많이 자란 건 아닌데 조금씩 미끌리더라고. 손톱을 자르고 편하게 써야겠다 싶어서 편지를 쓰다 말고 손톱을 깎으러 갔었거든.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다음 문장을 써나가고 있었어 한참을. 그런데 자꾸 손톱이 살짝살짝 미끌리는 거야. 나 참. 아까 손톱 깎으러 가서 손톱 대신 발톱을 깎고 왔더라. 손톱은 그대로 두고. 나 이대로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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