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메모
상관없어. 네가 쓰던 우산으로 줘.
손잡이가 고장 나서 혹은 씩씩한 자동이었으나 번거로운 수동으로 몰락해버린, 약간 불편해진 우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고장 난 우산을 씩씩하게 쓰고 가는 나를 보며 걱정하는 얼굴들을 잠깐은 견뎌야 하지만 새 우산을 쓰는 것보다는 어쩐지 괜찮은 기분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집에 놓고 간 우산이나 회사에 버려진 우산들을 모아서 갖고 있는 편인데 이상하게 그런 우산들을 쓰면 금방이라도 네가 나타 나 손바닥으로 내 머리 위를 가려 주는 기분이 든다. 소리 없이 머물고 있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내 우산.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우산.
비가 올 때면 한쪽에 비상용 우산을 끼고 나를 기다리던 네 모습이 보여. 정말 아직도냐고. 그래, 정말이야. 비만 오면 보여. 창문 너머로 빼꼼 나온 많은 얼굴들 틈으로 너의 등을 보는 게 비 오는 날의 내 일이었거든. 그래서 하나도 잊지 않았어. 한 번씩 비 오는 저녁을 배경으로 글을 쓸 때가 있었어. 그럼 어김없이 너도 오니까. 빈 종이에 ‘비 내리는 날’ 이라고만 써놓고 있어도 언제든지 너를 볼 수 있었어. 비의 모든 형태에 네가 있으니까. 어쩌면 내 몸 어딘 가에는 비만 오면 고여 있는 기억이 새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 비 내리는 날이면 우산 하나를 꼭 끼고 서 있던 네 등이 새어 나왔지. 세 뼘이 조금 넘던 단단하고 외로운 등, 언제든 달려오는 등, 한쪽만 젖은 등, 괜찮은 척하는 등, 기다림에 익숙한 등, 눈물이 나면 들썩이는 등. 들썩이게 될까 봐 애써 씩씩한 너의 등.
비 오는 날보다는 네가 서 있는 날.
그렇게 기억하는 편이 더 좋아.
지금 말하기는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우산을 들고 기다리던 네 등을 볼 때마다 와락 껴안고 싶었어. 어차피 네 거니까 갖고 가. 내가 우산을 챙겨 온 날에도 넌 항상 같은 말을 했어. ‘어차피 네 거’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을 때마다 좋았어. 가끔 네 말투를 흉내 내며 혼자 읊조린 적도 있어. 그때 네가 준 우산은 무거워도 꼭 내가 챙겨갔어. 아무한테도 안 빌려줬어. 네 말대로 그건 내 거니까.
요즘은 혼자 비를 맞기도 해. 내 정신에 우산을 잘 챙겨 다닐 리가 있어. 으슬으슬 춥다가 끝내 감기에 걸릴 때도 있어. 차가운 공기 냄새가 온몸에 진동을 해. 그럴 때면 운동장에서 흠뻑 비를 맞으며 너를 기다려 보고 싶어. 내 우산을 인생의 큰 임무처럼 여기며 챙겨주던 너니까 비 맞은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네.
어른이 됐다는 건 비가 오는 날. 아니, 언제라도 비올 걸 대비해 스스로 잘 챙겨 다녀야 하는데 그렇게 치면 어른이 되긴 한참 먼 것 같아. 가끔은 너를, 어디선가 달려 올 엄마를 기다리고 싶거든. 이제 아무것도 아닌 비 때문에 만나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거기에 너는 없지만 그 기억들이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니까. 충분히 사랑 받았다고 알게 하니까. 비가 좀 오면 어때. 여전히 나한텐 네 우산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