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달리기 #01
2019년 5월 12일 일요일
18도 맑음, 미세먼지 보통
3K, 20:14, 6’40”
'인생 첫 달리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달리기는 네다섯 살 때 친구들과 공원이나 놀이터, 비좁은 골목길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가만, 그때의 나는 과연 달린다는 사실을 감각이나 했을까?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놀이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을까?)
소독차가 지나간 자리 같은 희뿌연 기억마저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수록 바닥이 난다. 내게 달리기라는 것은 한동안,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달리면 100미터 기록이 겨우 나오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체육시간에 어쩔 수 없이 달렸던 순간들로 기억됐었다. 언제부턴가 달리기는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 아이들에겐 꽤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초등학교 때 나는 100미터 기록이 18초쯤 나오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오래 달리기는 영 젬병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운동장 크기만큼 달랐던, 적게는 5바퀴에서 많게는 8바퀴씩 달려야 했던 체력장 오래 달리기는 매번 꼴찌 그룹이었고, 비록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매번 5등급을 받았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턴가 100미터도 기록이 썩 좋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기록을 재는 남자 선생님 앞에서 가슴을 흔들며 힘껏 달릴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일 거다.
난 지구력이 떨어져서 오래 달리기를 못해. 난 타고난 운동신경이 별로야. 난 폐활량이 안 좋아.
갖가지 핑계를 붙이며 15년 가까이 흘렀나 보다. 몇 번의 '헬스장 등록 후, 헬스장 사장님만 부자 만들기 프로젝트’에 성공하고서 '도저히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했던 게 작년 5월이다. 달리기와 피트니스를 꾸준히 하는 친구들이 종종 올리던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보며 나도 운동이라는 것을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우연히 <마녀체력>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마녀체력은 나와는 또 다른 종류의 저질체력(나는 어떤 종류인지는 곧…)인 이영미 작가가 사십 대에 자전거, 달리기, 수영 등의 운동을 시작하며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된, 그야말로 인간승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운동 에세이인데 아직 삼십 대 초반이지만 공감 가는 대목이 매우 많았다.
"몰입과 긴장을 반복하며 일하는 정신노동자일수록, 오히려 집중력을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적당한 혹은 격렬한 육체 활동이 절실한 법이다. 그래야 자기 분야에서 롱런하며 원하는 성과를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녀체력> 이영미
나는 내가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을 오래 하기 위해 창업을 한, '생업일치형' 인간이다. '운동을 시작해야지-' 마음먹은 것도, 해가 지날수록 떨어진다는 게 생생히 느껴지는 체력 탓이었다. 워낙 좋은 체력을 타고나서 남들보다 오래 일해도 밤만 안 새우면, 주말에만 푹 쉬어주면 오뚝이처럼 일어나 와다다다다- 달리는 스타일인데, 언제부턴가 기력이 조금씩 떨어졌다. 나이 탓이라고 하기엔 아직 삼십 대 초반인데, 나의 전성기는 사십 대나 오십 대에 와야 하는데 너무 이른 꺾임이었다.
그리고 창업을 한지 즉,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인 지 반년도 안되어서 5kg 넘게 몸이 불었다. 남들은 고민과 불안으로 살이 빠진다는데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먹는 스타일이라 덜 움직이고 더 먹으니 살만 불어갔다. 그러니 안 그래도 무거운데 갑자기, 더, 무거워진 몸을 그 좋은 체력도 감당하긴 무리였겠지. 그래서 이번엔 절대 헬스장 사장님만 배 불리지 말고 나의 체력도 챙기자는 굳은 다짐을 하며 헬스장에 갔고, PT를 끊었으며, 헬스장 사장님 대신 트레이너 선생님의 주머니를 채워드리고 있다. 성실하게, 1년 가까이.
아, 그래서 지금 체력도 좋아지고 달리기도 잘하느냐고? 그렇지는 않다. 내 기록이 말해주지만 나는 1K를 6분대에 뛰는 평범한 러너이고, 한 번에 3K 이상을 내달리면 그날은 꽤 컨디션이 좋은 편에 속한다. 요즘은 2K 정도는 쉬지 않고 뛸만하지만 3K는 간당간당하다. 그리고 몸무게는 1년 전보다 조금 더 나간다. (선생님, 왜죠? 왜 운동을 하는데 몸무게는 느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전과 비교하면, 나의 달리기 실력은 정말 아주 많이 늘었다. 처음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2분을 못 뛰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20분이 아니라, 2분이 맞다. 나는 내가 달리기를 한다는 사실 조차 어색해했고, 1분 좀 넘으니 정강이가 아파서 뛸 수 없었다(아마도 그건 준비운동 없이 바로 뛰어서였겠지만).
그러나 꾸준히 2분을 3분으로, 3분을 5분으로, 1K, 2K로 점차 늘린 덕분에 5K, 8K, 10K 마라톤을 한 번씩 나갔고, 이제 3K쯤은 거뜬히 뛰게 되었다. 전보다 더 잘 달리게 되었으니 백 퍼센트 만족스럽다는 말은 아니고, 나의 달리기 기능이 그 정도로 아주 조-금 진일보했다는 의미다. (중간중간 치킨을 먹은 횟수만큼 달리기를 했다면 벌써 하프에 나가고도 남았겠지…)
아직은 달리며 내딛는 한 발, 한 발마다 고민과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호흡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안정될까? 발바닥이 점점 아파오는 건 왜일까? 나는 왜 오래 달리면 어깨가 아프지, 자세가 잘못되었나? 아니 그래서 호흡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습습하하가 정말 맞는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문 궁금증 덕분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저어놓았던 일 생각은 잠시 접어둘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는 올해 10K를 세 번 완주하고, 내년엔 하프에 도전하는 게 목표니까! (목표는 교통통제가 풀리기 전 골인!)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더 잘 달리기 위해, 그리고 오래 일하기 위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리면서 <아무튼 달리기>를 연재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내 글을 읽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대신 운동화와 타이즈부터 주문하는 당신에게, '쟤도 뛰는데, 뭐…’라는 용기를 건네기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