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후배 연지(가명)에게서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새해 안부와 함께 다음번 한국에 방문하면 꼭 만나고 싶다고. 그냥 감으로 '이 녀석 뭔가 고민이 있군!' 하는 기분이 들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역시 그렇단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 아니 그렇다면 뭘 다음 한국 방문까지 기다려. 화상 통화로 하자. 대신 다음 주 출장이고 계속 이동하느라 일정이 빠듯하니 그다음 주로 해요. 시차 고려하고 편한 시간으로 몇 개 옵션을 보내시고.
연지: 바쁘실 텐데 너무 감사해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언제가 되시든 맞출게요. 선배 편하신 시간으로 정해주세요. 제가 맞출게요! (시간차를 두고 메시지가 5번에 나뉘어 올라왔다.)
무척 자연스러운 이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겠냐마는 나는 대답하기를 멈췄다.
편하게 대해도 될 텐데 굳이 존칭을 써가며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본인이 원하는 시간 몇 개 정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까 답답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도 그랬다. 유난한 예절, 감히 뭘 정하려 들지 않는 겸손함.
유럽인들에게 익숙해진 만큼 한국의 정서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과거 나의 모습을 낯설어하는 내가 또 낯설어서 이상스러운 기분이 들곤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내 주변의 유럽인들은 대체로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전혀 논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에게 이것을 해주세요. 왜냐하면 내가 그걸 원하니까요." 하는 식이다.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 다국적 유럽인들의 팀장이 되었을 때 당황스렀던 순간들은 셀 수도 없다.
어느 날 팀원 중 한 명인 윌리엄 (William, 가명, 네덜란드인)이 면담을 요청했다. 일을 되게 못하는 직원인데 느닷없이 런던 비즈니스 스쿨 (MBA 순위 글로벌 TOP 10, 수업료 매우 비쌈)의 수천만 원짜리 프로그램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어찌 대답해야 할 방법을 못 찾다가 일단 HR 인사부와 회사 방침에 대해 알아보고 회신하겠노라며 돌려보냈다.
나: (상황 설명 후) 이게 말이 되는 요구인가요?
인사부 담당자: 회사가 그런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는 하죠. (WHAT?! 왜 나는 몰랐지?) 하지만 최고 인재 (top talent) 일 경우에 한하고요. 이 직원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회사 내부 프로그램이나 몇백만 원 수준에서 지원해 주는 걸로 하면 좋겠는데요.
교훈 1. 회사는 생각보다 해줄 수 있는 게 많구나. 나도 써먹어야겠다.
교훈 2. 자격이 있든 없든, 일단 요구하고 나서면 뭐라도 얻어 가는구나.
나와 일하는 유럽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게 있으면 요구한다.
내가 이것을 요구할 자격이 있나 없나를 따지는 자기 검열의 정도가 아주 낮거나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한다. (윌리엄을 보라). 특히 그 자격의 판단을 남에게 맡기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일상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
1. 승진이나 연봉 인상 요구: 연말 평가 기간이나 연봉 협상 기간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평소에 매니저와 일대일 면담 기회가 있을 때를 최대한 활용하고, 본인의 업무가 확장되거나, 크던 작던 성과를 인정받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2. 중요한 미팅이나 행사, 해외 출장 참여: 직급이나 업무 성격에 따라 초대장을 받지 못했을 때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면 반드시 이유를 따져 묻고, 납득을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한다. 대부분 그 열정이 가상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3. 교육, 복지, 가족의 사정: 요청의 종류와 한계가 끝도 없다.
최근에 부하 직원의 부하 직원인 필립 (Philip)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아내가 변호사인데 큰 프로젝트를 맡아서 6개월간 런던에서 근무할 예정이다. 신혼이기 때문에 떨어져 살기 싫다. 6개월 동안 런던에서 재택근무를 하게 해 달라.
고민을 싸안고 찾아온 롯데(Lotte, 필립의 팀장)에게 전달한 나의 기본 지침은 '팀장이 업무적인 이유로 암스테르담 출근을 지시할 때 지체 없이 나타날 것'에 동의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것이었다. 물론 인사부와 세금 관련 부분은 사전에 확인해야 하고.
회사 입장에서는 자잘한 이유로 직원들의 사기가 꺾이거나 이직을 하게 되면 손해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요구 사항들은 수용하려고 하는 편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십수 년의 직장 생활을 한 후에 유럽으로 온 나에게 "요구하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거절당하는두려움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습관이 안되어있었다. 나는 충실하게 어떤 자격을 갖추려고만 했고, 기회나 특혜는 위의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챙겨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항상 직원들의 요구사항에 둘러싸여 있는 리더의 입장이 되어보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직원에게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
직원들로부터 각종 요구를 받고 당황도 많이 했지만, 배우기도 하고 힌트도 많이 얻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거절당하는 것'은 나의 인격과 커리어에 아무런 데미지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과, 거절당하더라도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언가를 요청하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거절당해 봤자 그냥 현재의 현실로 돌아올 뿐이다.
'거절당할 용기' 덕분에 얻은 것들과 진행되는 일들의 목록.
1.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최고경영자 프로그램에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다녀왔다.
2. 작년에 서울에서 휴가 중일 때 CEO가 한국에 깜짝 방문했다. 중요 미팅에 배석하겠다고 요청했고 수락되었고, 몇 가지 중요한 성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참석을 요청해 보긴 생전 처음이라서 엄청 망설였었다.
3. 현재 보직을 마치고 수년 내에 가고 싶은 다음 자리 몇 개를 지정해서 인사부에 알려주었다. 해당 포지션의 후임자 리스트에 올라갈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는 요청이다. 최악의 상황이라 봤자 'no'를 듣는 정도다.
4. 8년 만에 다시 네덜란드말이 배우고 싶어졌다. 회사에 출장 강의를 해 줄 선생님을 요청했다. 안된다고 하면 내 돈으로 배우면 된다.
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은지에게 카톡을 보내야겠다. 커리어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연지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그걸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겠다. (통화하고 싶은 시간을 정해서 보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