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경험하는 연쇄 살인의 기시감
팔방미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제작진은 이 작품을 4-4-2(멜로 4-휴머니즘4-스릴러2)의 배합으로 조제한 칵테일이라고 하지만 잔을 든 시청자는 혼합된 결과를 단숨에 마시고 갈급해진다. 어서, 다음 화를 다오.
동백꽃 필 무렵(이하 동백꽃)이 첫 화부터 쏟아내는 이미지는 그저 그냥 따듯한 일상이 결코 아닌데 거기에 주축으로 기여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경찰 용식(강하늘 배우)의 범죄 현장 씬(scene)이다. 흡사 *CSI 옹산(*CSI: Crime Scene Investigation. 미국 CBS에서 2000-2015년 방영된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한 수사물 시리즈. 인기에 힘입어 뉴욕 등 3개의 스핀오프가 추가 제작되었으며 CSI 과학수사대라는 편명으로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덤을 형성했다.)이라 할만한 색채의 장소는 스산함이 가득하고, 인물들은 경악하고 절망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백(공효진 배우)과 용식이 성실히 애정 전선을 조각하고 있을 때에도 한켠에서는 지속적으로 강력범죄가 회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옹산은 인간미와 정감이 넘치는 '대추나무 사랑 걸린' '전원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장소 같다.
씨족사회처럼 관계의 과밀착이 거의 평생 유지되는 옹산 커뮤니티에 어느 날부터 이상한 사건이 반복된다. 옹산이라는 마이너 한 지명을 전국구로 널리 알린 연쇄살인이 그것이다. 살인은 직업여성(유흥업소 종사자를 완곡하게 일컫는 기묘한 한국 용어), 성인 남성, 부녀회장, 초등학교 남학생, 피부관리사를 거치며 지속되고 경찰은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다. 가장 최근 살인 현장의 생존 목격자가 동백이다. 그는 범인의 일부 모습을 보았고 소리를 들었으며 살해 위협을 당했다. 일반적인 추론이라면 옹산을 즉시 떠나고서도 평생을 병적 공포에 시달리만 한 데도 동백은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범인이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볼 것'을 추정하고 더 꼿꼿해진다.
연쇄 살인(Serial Murder)은 현대적 개념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 30여 명을 강간-살해한 테드 번디(Ted Bundy) 사건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된다. 그는 이제는 익숙해진 사이코패스(Psychopath,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모범으로 스스로 사람들이 왜 친구가 되는지 알 수 없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술회했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게 사회적으로 잘 기능(테드 번디는 로스쿨 재학생, 주립 서비스 기관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연애하는 여성은 따로 두고 범죄를 저질렀다.)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섬뜩함을 불러일으킨다. 연쇄 살인이 심리적 냉각기를 갖고 세건 이상의 독립적인 살인을 저질렀을 때 정의된다는 점에서 범인들의 사고와 행동 능력은 평균 이상으로 측정된다.
옹산의 연쇄 살인범 '까불이'도 그러한 특성을 다수 지녔다. 그의 행적은 극의 초반부터 단편적으로만 제시되기에 추정할 단서가 많지 않지만 하나씩 발견해가는 시청자들은 애가 닳는다.
1. 범죄 현장에 '까불지 마'라는 동일 필체의 흔적을 남긴다.
2. 까멜리아(동백의 식당)의 구조에 익숙하다.
3. 살인 이전 방화가 선행한다.
4. 길고양이 사료를 챙긴다.
이 정도가 까불이를 향하는 특성이다. 심각한 연쇄 살인범의 별명이 '까불이'가 된 설정은 짝이 맞지 않는 양말처럼 어딘가 코믹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현실세계의 근거가 있다. 130여 건의 연쇄 강도-강간을 벌인 '대전 발발이'가 그것이다. 타 지역 명(광주-, 영주-, 마포- 등등)이 붙은 모방범죄가 기승을 부렸던 범행은 최근 수집된 DNA가 15년 전까지의 증거품과도 짜 맞추어지면서 줄줄이 검거된 바 있다.
일견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지칭하는 듯한 어감의 이 말은 90년대 형사들이 사용하던 은어로 이들 성범죄자들이 아무데서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쌔게 피해 다닌다는 특성을 담았다는 설이 있다. 반면 여성 입장에서는 대상을 주간에 미행하여 면밀히 파악해 두었다가 밤 시간대 주거공간에 침입해 모녀를 연달아 성폭행하는 등 극도의 두려움에 발발 떨게 해서라는 해석이 덧붙었다.
강간-폭행-살인으로 이어지는 강력범죄인 사건들이 이러한 명명으로 인해 가볍게 희화화된다는 비판은 당시에도 있었다. 동시에 이 같은 범죄 현상이 사회적인 고압(까불지 마라)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동백꽃은 발발이를 충실히 내포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호재일까 혼란스러운 상징적 사건이 하나 더 때를 맞추었으니 바로 '화성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이다. 통상 '화성 연쇄 살인'이라고 축약되는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춘재의 DNA 매칭과 정교한 프로파일링(범죄유형분석)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며 현재 진행형으로 미제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경기도 화성 지역을 범죄의 온상마냥 공포스럽고 추악한 곳으로 수십 년간 낙인찍어 왔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여성들이 자의 반 타의 반 '밤길 조심하라'는 잠재적 공포에 짓눌리게 한 주요한 집단 무의식의 발원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까불이의 '까불지 마'라는 이 한 마디가 이렇다 할 개연성은 없으되 그 지속적인 위협의 대상이 동백인 것은 필연적이다. 실제로 동백은 사건과 무관한 외진 골목에서 마주친 노숙자의 중얼거림에 까불이를 떠올리면서 위축되고 두려움을 느낀다. 수많은 발발이와 이춘재에 대한 공유 경험을 드라마는 훌륭히 재현하고 시청자는 소스라치며 체험한다.
그러나 동백의 혁신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그는 더 이상 쫄지도 않고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다.
동백에게 까불이는 형체가 있고 당위성은 없는 공포다.
몸속 아이를 세상으로 내어놓는데 누구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지했던 동백은 옹산의 오명과 까불이의 협박보다 강력한 삶의 용기를 주섬주섬 꺼내 보인다.
두려움을 먼저 느끼는 개가 짖는 소리를
동백과 함께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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