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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phael Aug 08. 2023

없는 포지션을 만들어서 가는 법


몇 개월 전 기존 팀에서 새로운 팀으로 옮기는 것이 확정된 이후, 내가 합류하면서 맡게 될 롤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이 결정 나지는 않았었다. 팀 리더와 잠정적으로 큰 방향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른 팀원들과 함께 조율하고 검토해서 순차적으로 정해질 계획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업무와 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업무를 논리적으로 연결해서 새로운 포지션에 대한 Job Description (JD)을 직접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의 성과를 새로운 팀에서 인정받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혹은 그저 수동적으로 업무가 주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불안해서였는지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쉽지 않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무척이나 아쉬울 것 같고, 기왕이면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JD 작성은 내가 팀 리더라면 어떠한 업무가 가장 필요할지, 그 업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어떠한 것들이고 필요한 역량은 어떠한 것들 일지에 대해 작성했다. 물론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내가 필요를 느꼈던 부분들과 더불어, 실행되지 못하고 아이디어 수준에서 그쳤던 업무들, stakeholders로부터 꾸준히 받았던 피드백들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당장 새로운 팀에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업무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새로운 포지션/롤에 대한 사전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리더급들 워크숍 과정 중에 포지션과 관련 있고 유의미한 질문들을 여러 차례 공유하며, 현재 새로운 팀에서의 부족한 부분이 어떠한 점인지에 대해 본인들 스스로 느끼게끔 하는 기회를 갖고자 노력하였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워크숍 마지막 날 저녁 식사 이후에 찾아왔다. 일반적으로 엘리베이터 스피치 (Elevator Speech)라고 불리는 짧은 순간에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는 저녁 식사 이후 팀 리더의 호텔과 나의 집을 향하는 같은 방향의 트램 안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 시간을 만들기 위해 팀 리더의 호텔 위치를 사전 파악하고, 리더가 귀가하는 시간까지 같이 머물러 있었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롯이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렇게 찾아온 (혹은 공들여서 만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미리 작성해서 프린트해둔 JD를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서 겸손하지만 단호한, 그러면서도 논리 정연하게 의사 표현을 해 나갔다. 사실 둘 다 와인을 어느 정도 마신 상태였기에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다고 기억하고 싶다. 고이 접힌 프린트 종이를 사이좋게 너 한 장 나 한 장 나누어 갖고, 내가 생각하는 팀이 필요로 하는 role은 이러한 업무이며,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다른 업무가 없다면 이러한 업무를 해보고 싶다고 어필하였다.

결과는 놀랍게도 리더도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내가 작성한 JD에 본인이 생각하던 업무에 대해 잘 정리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바로 그렇게 하자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흔들리는 트램 안에서 내 새로운 포지션은 결정이 되었다. 팀 내 공식적으로 나의 새로운 포지션이 발표가 되자, 오히려 해당 업무에 대해 물어보는 팀원들이 많아서 조금 귀찮아지기는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아주 수월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먼저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다른 인원이 해당 업무를 하게 되었거나, 애초에 새로운 포지션이 별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아마도 본전보단 더하지 않았을까? 결국 리더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팀의 방향성과 자기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매니저로써 나의 인상은 남겼을 테니.

트램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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