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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9. 2019

나는 아빠를 잘 모른다 (2)

짐작과 추측으로 채운 아빠와의 삼일

꼴 좋다. 상주 맨 안쪽 자리에서 외딴 섬처럼 서 있는 아빠를 보니 속이 시원했다. 밤 10시쯤 차려진 빈소, 모레 새벽 5시가 발인인 점을 감안하면 3일의 장례를 만하루 동안만 치르는 셈이다. 하루 동안 할아버지의 친구분들과 친척들, 여섯 명의 작은아빠들의 지인이 이곳을 찾을 테지만 아빠를 찾아오는 지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문상객들을 상주 자격으로 맞이할 때마다 자신이 선 자리는 점점 좁게 느껴질 테고 당신의 아버지와 형제들과 단절된 채 살았던 이십 년이 넘는 공백의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하리라. 24시간이 길고 길게 느껴지겠지. 물론 나의 짐작이다.      




둘째날 아침에 터미널로 시부모님을 마중나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주차장 줄이 길었고 두 분은 먼저 들어가신다고 하여 입구에 내려드렸다. 나는 둘째 작은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두 분을 부탁했다. 주차를 마치고 식당에 들어서자 시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작은아빠가 자리를 떴고 나는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시부모님에게 물었다. “제 아빠 보셨어요? 젤 안쪽에 서 있었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듯,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친구를 고자질하듯 말했다. 내 친구가 문상 왔을 때도 그랬다. “들어가면 맨 안쪽에 가장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이 아빠야.”      

친구가 할아버지에게 꽃을 올리고 상주들과 인사를 마치자, 옆에 서 있던 나는 작은아빠들에게 친구를 소개했다. 아빠의 시선이나 말 한마디가 보태질 새라 서둘러 데리고 나왔다. 시부모님이 가실 때도 제일 안쪽까지 목소리가 가닿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아빠, 시부모님 가신대요”라고 전했다. 그 말에 작은아빠가 일어서는데 옆에 앉아있던 아빠도 엉거주춤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놀라 작은아빠가 나오기도 전에 시부모님을 복도 쪽으로 서둘러 안내하며 등을 돌렸다.      


화장실에 가거나 바람을 쐬러 나갈 때마다 아빠와 마주치는 순간을 염려했다. 눈물이 날까봐,감정이 동요하는 모습을 들킬까봐 걱정했다. 혹여 나에게 말이라도 걸면 어떻게 감정을 제어해야 할까 고민했다. 가장 아픈 말을 골라 한방 날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욕이 나오면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내키는대로 하자고 마음먹으니 일단 편해졌다.           




구의동 어느 골목에 삐딱하게 서 있던 한 사람


어느 더운 계절이었다. 열두살쯤의 나는 엄마를 따라 구의동 골목을 헤맸다. 사업을 한다고 전세보증금을 가져가서는 생활비를 주지도 않고 집에도 잘 오지 않았던 아빠와 아빠의 사무실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다 어느 골목 끝에 삐딱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온몸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날 선 사람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불청객을 맞이했다. 나에게 어떤 시선도 주지 않았던 ‘아빠’라는 사람의 무관심에 얼음처럼 굳어버린 상태로 바로 앞 건물 지하로 따라 내려갔다. 그때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단숨에 사람을 지워버리는 지우개가 있다면 내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처음부터 마주치지 않은 것으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방학이 되면 엄마가 출근한 뒤 집 안 청소를 했고 배가 고프면 밥을 챙겨 먹었다. 계란후라이 정도는 스스로 해먹을 수 있었고 오빠 밥도 차려줬다. 큰 상을 펴놓고 방학 숙제를 했다. 물려받은 백과사전에서 악기 사진을 오려다가 현악기와 타악기를 구별하여 붙이고 설명을 옮겨적었다. 새 교과서를 읽어보고 영어 단어를 외우다보면 땅 위에 턱걸이하듯 붙어있는 지하방 창문에 파란 저녁이 새어들곤 했다. 텔레비전을 켜고 막 시작하는 만화를 보면서 책을 치우고 저녁상을 준비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해놓는 것까지가 나의 할 일이었다. 불안한 삶이어도 해야 할 것 같은 일은 피하지 않았다. 집안일과 학교 공부에 열심이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성취감이 불안감을 덮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눈물이 날 땐 울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몰라서 혼자 있어도 마음껏 울지 못했고, 즐거울 때 역시 마음껏 웃어도 된다는 것을 몰라서 죄책감이 들지 않는 한에서 웃곤 했다. 조마조마한 시절이었지만 나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을 다해 시간을 통과했다. 지금 나에게 구의동 골목에서 원했던 그 지우개가 있다면 내가 아니라 아빠를 지웠을 것이다. 그날의 부끄러움은 내 몫이 아니라 아빠의 몫이었으니까. 나는 달라졌다.      


아빠와 마주칠 미래의 어느 순간을 위해 노력한 삶은 아니었으나, 잘 살고 싶어서 애썼던 나의 어제들이 상주 자리에 서 있는 아빠 앞에서 유독 더 빛나 보였다. 내 앞에서 짐을 싸서 나갔던 아빠는 삼십대 후반이었고 지금 나는 서른여섯이다. ‘나는 아빠와 다르다, 주저앉아 울더라도 내가 책임져야 할 무언가를 못 본 척 회피하지 않았고, 움츠러든 적도 많았지만 남 탓하지 않았다, 잘못했을 때는 인정하고 사과했다, 부끄럽지 않은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했다,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되도록 그렇게 살려고 애쓸 것이다.’ 시선을 둘 곳도, 말을 건넬 곳도 없이 구부정하게 서 있는 아빠 앞에서 이렇게 으스대고 싶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아빠에게 묻고 싶었던 한 가지


둘째날 오전. 내 딸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엄마가 장례식장에 왔다. 할아버지의 임종 일주일 전쯤 병원으로 가서 뵙고 온 터라, 지난 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던 엄마는 결국 조문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시부모님을 마중 나간 때였고 가깝게 지내던 작은엄마는 공교롭게도 시장에 갔던 때였다. 시아버지였던 분의 장례식장에 온 엄마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온 아빠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만 했던 순간, 엄마는 ‘내가 죄 졌냐’ 하는 마음으로 혼자서 들어갔다. 엄마를 본 어느 작은아빠는 달려나와 부둥켜안으며 울었고, 어느 작은아빠는 엄마가 문상하는 사이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았고, 작은엄마들은 식당 입구에서 엄마를 반겼고, 어디선가 ‘호찬애미가 왔어?’ 하며 엄마의 옛 시작은어머니들이 나타났다고 했다. 장례식장을 지키던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아빠와 엄마의 공백은 비슷했으나 그날의 처지는 달랐다.     


문상객들로 북적였던 저녁 무렵. 친구를 배웅하려고 식당을 나서려는데 아빠가 내 시야에 걸렸다. 식당 한가운데 앉아서 오래전 본 것 같은 먼 친척들과 술잔을 앞에 두고 입을 벌려 웃고 말도 하고 있다. 자기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드는 나의 아빠. 한심했고 안심도 되었다.      




발인 후 장례미사를 드리러 간 성당에서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만들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아프거나 못된 말이 아빠에게도 그러리란 법 없고, 뾰족한 말하면 내 마음부터 다치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말을 고르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이 말 저 말 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한 문장이 남은 것 같다. 묻고 싶었다. 나를 무수히 많은 절망에 빠뜨리게 한 아빠가 아니라, 4인 5각 달리기를 하던 중에 자기 발목에 묶인 끈을 갑자기 끊어버리고 사라져버린 한 사람에게 품은 궁금증이다.      


‘원하던대로 살고 계세요?’ 나라면 배우자와 아이를 월세방에 남겨둔 채, 그들의 미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향해서 가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했다. 아마도 당신이 원하는 것과 배우자와 아이는 공존할 수 없었나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배우자와 아이를 떠났을 때 받을 비난이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포기했을 때 겪을 괴로움보다 더 작았던 거겠지. 감수하며 살리라, 그렇게 마음먹었겠지. 물론 나의 추측일 뿐이다. 어찌되었든 당신의 과거 선택으로 이어진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빠가 원하던대로 살았다고 대답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하면? 어느 것 하나 나은 대답이 없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기보다 질문에 내 마음이 있다. 아빠의 공백이 너무 커서 부재한 당신의 자리에 온갖 감정을 쏟아부었지만 이제 당신의 공백은 점차 줄어들 것 같다. ‘아빠’라는 존재를 향한 내 감정의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분노보다 아빠라는 역할을 수행했던 한 사람의 과거 선택에 대해, 그리고 이어진 삶에 대해 갖는 단순한 물음이다. 미사를 마치고 벽제 화장터로, 식당으로, 호국원으로, 다시 서울로 이어진 하루 동안 나는 그 사람과 마주치지 못했다. 기회는 오지 않았고 나는 애써 만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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