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를 향하여 귀하게 놓여진 책의 길...
도정일 문학선의 두 번째 책으로 산문 모음집이다. 첫 번째 산문집인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크게 구별할 필요 없는 여러 글들이 모아져 있다. ‘이야기 사이로’, ‘공생의 도구, 책’,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은’, ‘시대를 위하여, 시대에 맞서서’라는 네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 사회와 현 시대를 향한 저자의 시선은 영화를 소재로 한 세 번째 챕터의 글들에서조차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글을 여러 지면에 싣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스레 사람을 죄송스럽게 만든다.
“.... 자본주의는 원래 불평등 체제니까 이 체제에서 불평등은 그 자체로 정의라고 생각하는 정치세력도 있다. 인간세계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불평등을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평등 속으로 녹여내고 불평등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pp.53~54) <돌아온 돼지 - 혹은 자본주의판 『동물농장』> (경향신문 2002.11.27) 중
책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저자가 가지는 관심의 또 다른 초점은 우리 사회가 견지해야 할 어떠한 가치관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다. 물질적인 기준에서의 잘 삶이 아니라 이 사회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올바름을 기준으로 한 잘 삶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그리고 보다 실질적으로 실행되어야 할 어떤 일들을 내처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니, 선생이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 책을 읽자는 운동이 바로 선생이 실행하는 하나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 가치관을 살피는 것의 의미가 저지 않다.
“... 문학은 권력의, 그리고 맹목적 애국주의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심’이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한 것은 그게 어디 특산물이어서가 아니라 양심 그 자체의 소중함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역설과 비애는 있다. 한국의 언론 조직들이 보여주듯 표현의 자유조차도 양심을 떠나 추악하게 타락할 수 있으므로.” (p.89~90) <작가와 조국 - 오르한 파묵의 비애> (한겨레 2006.10.27) 중
더불어 하나의 시평이기도 한 그의 글들은 글이 씌어진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그 표현의 자유 안에 깃들어 있는 양심에 시선을 두고 있었던 2006년의 글은 2013년인 지금 더욱 절실하게 읽힌다. 하나씩 하나씩 파멸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언론들은 그야말로 양심 없는 자유의 표본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뒤풀이해서 말하게 되는 바, 과거의 어떤 혜안은 현재를 더욱 투명하게 바라보는 힘을 지닌다.
“어떤 단기적(이를테면 취업, 자격증, 시험 같은) 목표 때문에 관련된 책을 읽는 이른바 목적성 독서는 ‘사냥’과 흡사하다. 반면, 특정의 정보 사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목적성 독서는 ‘춤’과 같은 데가 있다... 사냥과 달리, 이 경우의 독서행위는 정신을 자극하고 마음을 확장하는 일, 곧 ‘혼의 즐거운 춤’ 같은 것이다. 이 춤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 추어야 하는 춤이다.” (p.141) <사냥과 춤> (동아일보 2005.12.19) 중
이번 산문집에서도 책 혹은 책 읽는 행위를 향한 저자의 관심과 애정은 여전하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표현이 바로 위의 문장에 들어 있다. 책을 읽는 행위가 책을 읽는 당사자에게 제공하는 어떤 이로움을 ‘사냥’과 ‘춤’이라는 두 갈래로 살펴주고 있는데, 아무래도 ‘사냥’보다는 ‘춤’이 주는 즐거움을 취하고 싶은 것이 나의 책 읽기이다. (다행이다, 나는 이런 방식의 춤추기에 여간해서는 질려 하지를 않는 것 같다...)
“... 집단주의 문화나 개인주의 문화의 좋은 가치들은 다 내버리고 집단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과 개인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만 골라 선택 조합하고 결합시키는 것이 악성 조합이다. 문화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집단주의의 가치, 이데올로기, 지향들과 근대 개인주의적 문화 요소들이 아주 어지럽게 혼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혼재 양상의 지배적 특성은 두 문화의 악성 조합, 곧 문화의 타락상이다.” (p.252)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악성 조합> (한겨레 2007.1.19) 중
“증오는 분노와 다르고 화내기와도 다르다. 분노나 화는 감정의 일시적 파동 같은 것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풀리고 성찰을 통해 해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증오는 훨씬 지속적이며 완고하고 성찰을 거부하고 맹목적이다... 증오는 그 대상에 대한 어떤 존경도 거부하며 상대에 대한 치열한 경멸 위에 번창한다. 분노와 달리 증오는 사회적 전염성이 높고 훨씬 집단적이며 파괴적이다. 화는 개인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반면 집단적 증오는 개인의 통제력을 넘어선 곳에서 작동한다.” (pp.254~255) <증오의 문화> (경향신문 2003.8.20) 중
지난번의 산문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의 많은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필요한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다시 살피는 것은 내 책 읽기의 방식이다.) 그렇게 붙여 놓은 포스트잇의 내용들은 이렇게 옮기고 그 과정에서 한 번 더 읽고는 한다. 책을 읽는 일은 이렇게 자꾸 되돌아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적절한 뒤돌아봄을 도와줄 글이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빈곤해질 터, 이 책이 귀한 이유이다.
도정일 /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 문학동네 / 349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