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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Oct 17. 2024

《바깥 일기》아니 에르노

'유일무이'하지 않게 채집되는 무수한 관찰의 기록들...

  어느 해 삼월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활짝 피기 직전의 봄, 집 근처 편의점 옆으로 연결된 담벼락, 묘하게 조명이 빗겨 간 그곳을 지나치는 순간, 앳된 소녀가 마찬가지로 앳된 소년을 향해 폴짝 뛰어오르며 두 다리로 허리를 감싸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는 ‘왜 당신은 내 마음을 이리도 힘들게 만드는 것인가요?’라고 문어체 문장을 구사하였는데, 그 소리가 골목에 쩌렁쩌렁 울리더니 드디어 봄이 활짝 피어났다. 





  “... 쇼핑 카트를 수거하는 직원이 주차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통로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은 푸른색 블레이저를 걸쳤고, 늘 입는 회색 바지가 커다란 신발을 덮었다. 시선은 무시무시했다. 그가 내가 놔둔 카트를 거두러 왔을 때 나는 주차장을 거의 빠져나갈 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RER 노선 연장을 위해 파헤쳐 놓은 긴 호를 따라 난 길을 택했다. 신도시의 중심을 향해 내달릴 때 해가 늘어선 철탑의 엇갈린 강철 막대들 사이로 지고 있어서, 해를 향해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p.12)


  나 또한 (작가처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아니 좋아하였다기보다는 그것이 (아니 에르노와 같이) 어떤 숙명처럼 내게 바투 다가서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의 관찰은 게으르기 그지없었고 나의 기록은 미진할 뿐이었다. 나의 관찰은 지극히 사적인 수준에서 그쳤고 나의 기록은 그렇게 사적인 것으로 남겨졌다. 나의 관찰은 매일의 기록이 되지 못하였고 나의 기록은 보다 정직하기를 거부하였다.


  “... 내가 기를 쓰고 현실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 오로지 감각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그러니까 감각을 〈자신보다 위에 놓지 않으려는〉 (학습된) 지적 습관에 따라서 종종 그러긴 하지만,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혹은, 내가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동작, 태도, 말의 기록은 내게 그들과 가까워진다는 환상을 품게 한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나는 그저 고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남기는 감정은 실재하는 그 무엇이다. 어쩌면 나는 그들을 통해, 그들의 행동 방식과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에 대한 무언가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종종 〈왜 내가〉 전철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저 여자가 아닌 걸까?〉 등등.) (p.38)


  처음 디지털 카메라가 나왔을 때 환호하였는데 최대한 많은 장면들을 포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서문에서 아니 에르노는 ‘사진을 찍듯 실재를 기술하는 글쓰기를 실천하려고’ 애썼다고 하였다. 나는 별다른 인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언제든 모니터에 재현해낸 장면들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고자 하였다. 다만 꾸준한 연습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는데, 그만 사진찍는 행위 자체에 ‘잠시’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7시의 파리행 열차에서 사람들은 아예 말이 없거나 혹은 느릿한 목소리로 최소한으로 말한다. 여자가 잠이 덜 깬 어조로 맞은편 여자에게 어항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 물고기 이야기를 꺼낸다. 「어항 물에 손을 넣고 첨벙댔는데, 꼼짝도 안 했어. 수면으로 떠오른 걸 보고 〈에이, 정말〉, 그랬지.」 조금 있다가, 그 여자가 다시 똑같은 사건을 꺼내면서 되풀이하는 말 〈《에이, 정말》, 그랬지〉. 그 여자가 말하는 동안, 창가 쪽의 또다른 여자가 호기심을 품고 그 여자를 응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조명은 노르스름했고, 다들 외투 안에서 갑갑했다. 열차 차창은 입금으로 뿌옜다.” (pp.76~77)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일기》를 읽으며 그때(의 내 행위들)를 떠올렸다. 책에는 1985년에서 1992년까지의 연도를 필두로 하여, 일기라고 명명될 수 있을까 싶은 산문들이 적혀 있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채집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자주 가는 쇼핑 센터에서 마주치는, 그리고 이동 중에 의도와 상관없이 바라보게 되는, 그렇게 일상 생활의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내는 모습과 소리를 (별다른 가감 없이)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전철 안에서, 젊은 남녀가 마치 그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격렬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껴안기를 번갈아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때때로 두 사람은 도전적으로 승객들을 바라본다. 소름 돋는 느낌. 문학이 내게는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든다.” (pp.98~99)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이런 행위를 자전적, 인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옮긴이의 말에 따름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을 향하여 ‘자전적’이라고 하려거든 그 앞에 ‘사회적’이라는 명시를 함께 해달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의 이런 글쓰기가 ‘사적 체험의 유일무이성’으로 가치를 얻는 것이라 여겨지기를 반대했던 것이고, (처음에는 오해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작가가 보여준 전체의 행보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정혜용 역 / 바깥 일기 (Journal du dehors) / 2023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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