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7시간전

김영하 《작별인사》

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막을 필요가 없어져서...

  “어쨌든 달마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른바 인간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 영화에서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학살하거나 외계 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우리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뇌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였고,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 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오래전 중국의 도가에서 꿈꾸었던 삶 인간에게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렸다.” (p.268)


  소설의 끄트머리 쯤에 가면 인간이라는 종은 사라지게 된다. 위의 문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챕터인 ‘마지막 인간’이 시작되지만 사실 거기에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란 ‘철이’는 사실은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그러니까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휴머노이드이고, 철이가 찾아가 만난 ‘선이’는 클론, 그러니까 복제 인간이다.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인류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의문들을 품어왔다는 것을 고전 SF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완벽하게 기계의 흉내를 내고, 그러다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pp.69~70)


  소설은 두 가지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인간과 기계(로부터 시작된 첨단 문명의 극한이라는 의미로서의)가 융합되는 근미래라는 (매우 가까운) 상상의 현실 안에서 철학적 그리고 윤리적 사고를 진행시키는 것이다. 사실 소설 속의 (친절하게 설명되는) 논쟁적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알쓸신잡을 떠올리고 말았는데, 작가인 김영하는 알쓸신잡 시리즈 세 개 중 두 편에 출연하였다.


  “그때 이미 선이에게는 남다른 사생관(死生觀)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간에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했다. 선이는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은 대부분의 시간을 절대적 무와 진공의 상태에서 보내지만 아주 잠시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우주정신과 소통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식이 살아 있는 지금, 각성하여 살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 각성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개의 의식이 찰나의 삶 동안 그렇게 정진할 때, 그것의 총합인 우주정신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p.100)


  그리고 다른 하나의 흐름은 인간의 멸종을 따라간다. 그 멸종의 흐름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왜 인간은 그 흐름을 막지 못하였는지, 아니면 그조차 인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캐치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러한 멸종의 흐름을 읽으면서 별다른 위화감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의외로 무섭다. 우리는 멸종을 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막을 필요가 없어서 멸종하게 될 것 같다.


  “최 박사는 과학에서 왜 의미를 찾아? 인류는 언제나 최신 과학의 성과들을 받아들이며 진화해왔지 의미를 찾아 진화한 게 아니었잖아? 진화에 의미나 목적 따윈 없었어. 절묘한 우연들이 중첩된 것뿐이었잖아.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것들을 설계한 건 우리지만 우리도 기계에 맞추기 위해 우리 자신을 꾸준히 변화시켜왔어...” (p.93)



김영하 / 작별인사 / 복복서가 / 305쪽 / 2022



ps. 나의 아버지는 한 달 전쯤 코로나에 걸렸다. 그 시기 이후 말을 끊고 침잠에 들어갔다. 함께 사는 엄마는 아버지의 우울증을 걱정하였고 우리도 그러했다. 아버지는 하루의 대부분 눈을 감고 앉아 있거나 누워 주무신다고 하였다. 실제로 부모님 댁을 찾을 때마다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고, 억지로 깨워 일어나게 만들어야 했다. 두 주 전 동네 치매안심센터를 먼저 들렀고 아버지의 인지 저하가 발견되었다. 센터의 의사는 섬망, 우울증, 치매 중 어느 것이 원인인지는 불분명하다고 하였다. (코로나에 걸린 것 말고도, 아버지는 팔십대 중반으로 접어들었고, 삼년째 표적치료제로 폐암을 관리 중이다. 어느 것이 아버지의 인지 저하를 촉발시켰는지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중급 병원에서 MRI를 찍었다. 혈관성 치매는 아니고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에 위축이 보인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지 저하의 원인과 이후의 치료 과정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인지 검사가 필요하다고 의사가 말했고, 검사일은 한 달 뒤로 정해졌다.


나는 삼 주 전부터 매일 점심을 부모님과 함께 먹고 있다. 아버지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처음 아버지를 치매안심센터에 모셔 갈 때 아버지는 멍한 상태가 9, 깨어 있는 상태가 1이었다. 엊그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이비인후과를 다녀오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였다. 물론 인지 저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나 아버지는 시간과 관련한 영역에서 인지 저하가 확연하다. 요일이나 시간의 개념이 흐릿해졌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편하게 인지한다는 사실에 의아해한다. 어떤 약은 먹었다는 사실을 잊고 다시 먹으려고 하시고, 어떤 약은 먹지 않았음에도 이미 먹었다고 여긴다. 나는 시간이 뒤엉켜 문득문득 당혹해하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곤 한다.


처음에 난감하고 슬펐던 감정은 조금 줄었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나와 동생이 번갈아 부모님 댁을 방문하며 정밀한 인지 검사 때까지 아버지를 살필 것이다. 동생과 나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내내 불화하였다. 동생은 특히나 그러했는데, 동생은 이즈음의 아버지가 귀엽게 느껴진다 하였다. 평생 아버지 앞에서 네, 네, 라고만 답해왔던 나는 이즈음 아버지의 알았다, 알았다, 라는 대답을 듣고 난 다음에야 돌아선다.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설을 열면 가장 먼저 위의 문구가 등장한다. 나는 이 문구를 읽자마자 곧바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게다가 책의 제목이 ‘작별인사’였다. 나는 혹시 책의 내용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면 어쩌지 걱정했다. 기우였다. 아버지는 일기를 쓰시는데 인지 저하와 맞물린 최근의 어느 날 이후 쓰기를 멈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엄마가 전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일기를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는 그것을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읽어야 할 날이 올까 무섭다. 아버지의 병 앞에서는 담담할 수 있지만 그것 앞에서는 담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중혁 《스마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