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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6시간전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이미 도착한 혼란이 이제 겨우 시작된 혼란과 한 자리에...

  모든 시선으로부터 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마, 라고 외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조차 목청껏 소리를 쳐볼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조용하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속삭이자는 것은 아니다. 속삭이는 것 보다는 크게, 그러나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은 아닌, 속닥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닫힌 독백에 머물고 말 것만 같은...


  “언젠가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맞닿은 무수한 기억의 편린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미지들은 하나의 확고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돌연히 나타나는 섬광과도 같다. 그 빛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강타하여 잠식한 뒤 이내 사라져버린다.” (p.14)


  길에서 길로 이어지던, 혹은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던 사랑이 있다. 골목길을 돌면 갑자기 나타나는 이층집, 현관을 통하지 않고 별도의 계단을 통해 드나들 수 있었던 방, 계단은 허리 높이의 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날 훌쩍 그 벽을 뛰어넘는 사내가 되었다.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방에서 홀로 나를 기다리고, 나는 허락되지 않은 시간을 골라 띄엄띄엄 그 주변을 맴돌았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려. 누군가가 보내준 좋은 차를 타고 특급 호텔에 가. 그런 다음 똑같은 양복을 차려입은 예의바른 사람들을 만나고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그다음에야 잠깐 회의를 하는 거야. 매번 일은 그런 식이야. 그리고 그 회의에서는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하지. 거기 앉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모르는데다 사실 관심도 없거든. 계속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어. 그건 잘못된 거라고 느꼈어. 그렇다면 그쯤에서 멈춰야 했어. 나는 회의가 끝난 어느 날, 그들이 준 돈으로 산 어색한 양복을 벗고 호텔을 빠져나왔지. 그러곤 지금처럼 사는 거야.” (p.42)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비행기를 탔다. 굳이 손가락을 꼽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느 비행기 안에서 영화 허, <그녀>를 보았다. 스칼렛 요한슨이 목소리로 연기하는 영화였고, 그 목소리는 그 높이에서 듣기에 좋았다. 누구와 동승하느냐에 따라 어떤 탈 것들은 스스로 공간의 구조를 바꾸어 버린다. 누군가를 대동하느냐에 따라 어떤 길들은 또렷하거나 뿌옇게 모습을 바꾸어 버린다. 


  “지하철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사랑한 적 있는 그 이상한 남자를 기억한다. 그는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낯선 여자에게 다가가 이따금 그 사람처럼 차갑게 속삭여주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너는 내 인생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어, 하고 중얼거린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그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테면 생각해. 하지만 네 인생은 변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만난 적이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이상한 순간들, 그 순간들이 우리를 서서히 변화시키리란 그의 말은 옳았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그 힘을 믿는 한에서.

딱 그만큼만, 그 힘은 파괴적이고 격렬하다.” (p.111)


  앞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옆 사람이 내고 있는 발자국을 놓치기도 하였다. 굳은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인데도 자꾸 맥없이 어둡게 사라지는 발자국도 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아래로 떨어지는 아이러니로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내가 머물러 있는 동안 어느새 저만치 앞서 나아가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을 말하였더니 그녀는 참으로 치사한 사람이라 일갈하였다. 


  “한번은 지하철 막차 안에서 노신사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정장 차림에 중절모를 썼다. 이십 분쯤 지났을 때 그가 내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어디를 가시나요. 나는 곧 내린다고 대답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의 정면을 바라본 채, 오늘밤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돈으로 여자를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경험 없는 청년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그러니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다.” (p.183)


  추운 하루였다. 내일은 25도까지 기온이 오른다고 한다. 나는 되도록 오늘만 살자고 되뇌며 살았다. 어쩌면 사랑이 간절한 하루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내 눈앞에서 서서히 변하는 사람을 발견한 참이었고, 앞으로도 그 변화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 이미 도착한 혼란이 이제 겨우 시작된 혼란과 한 공간에서 한참을 있었다. 오늘은 아주 추운 하루였다. 



장혜령 / 사랑의 잔상들 / 문학동네 / 255쪽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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