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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14. 2024

스티븐 갤러웨이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들만의 전쟁에 편입되지 못하는 또다른 그들의 자화상...

*2009년 5월 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전쟁의 참상은 미시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때 극대화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어떤 전쟁이든 승자와 패자가 있겠지만 조금만 적극적으로 전쟁의 가장 최전선에 눈을 들이대면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소설은 그렇게 흔히 보스니아 내전으로 불리우며, 나찌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충고에도 불구하고 개정판 인종청소가 자행된, 그렇게 우리들 현대 문명이 얼마나 허술한 모래 위에 세워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전쟁, 그 전쟁의 피해자들을 건조하게 바라봄으로써 전쟁을 향하는 우리들의 막연한 공포를 환기시킨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까지 계속 창가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빵을 사려고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박격포가 떨어진 지 24시간이 흐른 오후 4시, 몸을 굽혀 활을 집어들 것이다. 그는 첼로와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지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 텅 빈 거리로 향한다. 그가 박격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생긴 작은 구멍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주위에선 전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할 것이다. 그는 죽은 이 한 사람에 하루씩 22일 동안 매일 이렇게 연주할 것이다.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아다지오>의 힘이 충분한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첼리스트가 있다. 창밖을 바라보다 포탄이 떨어져 스물두 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는 모습을 확인한 첼리스트는 그날부터 포탄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저격수들의 시야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연주를 시작한다. 단 한 번 소설의 시작 부분에 살짝 등장할 뿐인 첼리스트는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할 뿐 다시는 주인공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 진짜 이름을 쓴다는 건, 그녀 자신을 그녀가 죽이는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이는 그녀의 삶이 끝나는 것보다 더 큰 죽음이 될 것이다.”


  대신 사라예보에 갇힌 채, 외부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세 명의 시민이 번갈아 나타나 소설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애로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전직 사격 선수이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이제 자신이 배운 사격의 테크닉으로 첼리스트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애로는 그렇게 첼리스트를 노리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수를 찾아 총구를 겨눈다.


  그런가하면 케난은 모든 것이 바닥난 도시에서 아내와 어린 아이들, 여기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괴팍한 노인네에게 필요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도시의 건널목을 무시로 횡단해야 한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총탄이 날아와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도로를, 자신의 뒤에 오는 누군가가 혹은 자신을 앞서간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는 그곳을, 먹을 물을 얻기 위하여 건너다녀야 한다.


    “... 세상이 이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의 기억 속의 사라예보에서는, 죽은 사람을 길바닥에 그대로 두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의 사라예보에서 그것은 정상이다. 드라간은 존재하는 도시에 참여하길 거부한 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서 살고자 애쓰면서, 두 도시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은퇴를 했을지도 모를, 아내와 아이를 외국으로 탈출시킨 드라간 또한 세 명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사라예보를 기억하며,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라예보를 기억하지 않으려 하며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드라간도 매일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다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은 이제 예전의 시민들이 아니고, 서로가 죽어갈 때 손을 내밀어주는 일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전쟁의 가장 극단적 피해자인 보스니아계 시민들은 전쟁의 또다른 당사자인 보스니아계 군인들 또한 아군이라고만 보기엔 석연치 않다. 사방이 막혀버린 그곳에서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장악한 채 이를 기회로 삼아 배를 불리우는 세력 또한 그들에게는 또다른 상대적 고통으로 작용할 뿐이다. 안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림자는 결국 이들을 이중삼중의 포위망 속으로 떨어뜨린다.


  “언덕 위의 저들이 다가 아니야. 여기에도 괴물들이 있어. 악한 것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자들이지.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 전쟁과 이 도시를 이용하고 있어. 나는 그런 자들과 한패가 되고 싶진 않아. 만약 전쟁이 끝난 뒤에 도시가 그렇게 돼버린다면, 이 도시는 구할 가치가 없어.”


  결국 첼리스트는 살아남았고, 많은 이들이 이 첼리스트의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전쟁으로부터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보스니아 내전은 이미 십오년 전에 끝이 났고,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는 상처를 가득 안은 채 봉합된 자신들의 공화국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들 범지구인은 이 전쟁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기는 한 것일까. 희망은 미시적인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의 수혜자가 되는 거시적인 저들에게 있지 않음을 돌이켜보는 일은 언제나 의미심장하다. 

 

 

스티븐 갤러웨이 / 우달임 역 /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The Cellist of SARAJEVO) / 문학동네 / 325쪽 / 20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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