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의 속삭임으로 떠나지 못한 자도 행복할지니...
*2009년 5월 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랜만에 참으로 화창한 날씨다. 숨겨 두었던 봄을 살짝 꺼내 놓은 하늘은 태연하기만 하다. 그렇게 5월이 되었다. 어떤 이는 터무니없이 적은 2009년의 휴일들을 떠올리며 알뜰하게 이 어여쁜 휴일을 즐길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자신과는 무관한 휴일을 아쉬워하며 사무실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사랑했으나 때때로 잊고 있던 그곳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떠났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김영하의 소설들에서 실망을 받아 안고 있는 즈음이지만 이상하게 김영하의 산문에서는 적절히 위안을 받고 있다. 작년 그의 동경 여행기를 읽으면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였다면, 올해에는 이렇게 그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읽으면서 여태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 (아마도) 한예종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벤쿠버의 교환 교수로 떠나는 사이, 집이 팔린 2008년 5월과 벤쿠버에서 교편을 잡아야 하는 그해 8월 사이에 있던 그의 시칠리아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친구나 선생들은 본래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여러분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새로운 예술을 알아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린 예술가가 신나게 붓을 휘두루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사진까지 더불어 있어 풍성한 여행기이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까지를 병행하는 소설가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또한 드문드문 포함되어 있다. 특히 왜 자신이 대학 교수라는 정착민이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소회를 기록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어쩌면 소설가인 자신이 제대로 된 소설을 써내는 대신 이런 여행집을 연이이 발표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극적인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거리는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에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후 1시가 되면 모두 일제히 철시한다... 그러고는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간다. 친구들과 어울려 거창한 점심과 와인을 마시며 두 시간쯤 떠들고 약간의 낮잠을 잔 다음 5시쯤 되면 다시 가게로 돌아와 문을 연다... 그리고는 다시 저녁 8시나 9시까지 영업을 한 다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삶도 서서히 이 거리의 삶에 맞춰져 갔다.”
하지만 그를 따라 들어선 시칠리아 작은 도시의 면면들을 바라보는 일이 싫지는 않다. 시에스타에 빠져 혼곤한 이탈리아 시칠리 섬 어느 소도시 골목길을, 이방인의 지위와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걷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도 같다. 얽매인 자의 고통이 말끔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모두가 모두를 아는 리파리’의 시장 상인들과 나누는 작은 미소에 대한 상상이 내 입가에도 엷은 미소의 자욱을 남긴다.
“... 나는 미美란 하나의 거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미란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음란한 매혹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다다를 수 없는 천상의 특질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정복함으로써만 소유 가능한 일종의 재산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끝내 이해 불가능한 난해한 개념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즉각 제거해야 할 불길한 미혹인 것이다. 미는 끝내 정의되지 않은 채 천상의 도시 깊은 곳에서 풍문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틈틈이 이어지는 일종의 아포리즘들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다. 슬쩍 위와 같은 구절을 옮겨 적어 놓고는 ‘미’라는 단어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를 삽입시켜본다. ‘나는 사랑이란 하나의 거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라는 변형된 문구를 떠올리며 홀로 즐거워한다. 그래 맞아 사랑이야말로 ‘거대한 오해’이고, 다다를 수 없는 ‘천상의 특질’이며 ‘난해한 개념’이자 ‘불길한 미혹’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으쓱한다. 저 멀리 떨어진 곳의 골목길에서 불쑥 튀어나올 법한 아포리즘이라고 여긴다.
“...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곤 한다. 낯선 이에게는 결코 내보이지 않는 행복한 표정들이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 떠 있는 광경은 나를 늘 흥분시킨다. 나는 페리의 난간에 기대 메시나 항을 바라보는 승객들의 얼굴들을 살펴보았다. 떠나는 아쉬움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여행지의 흥분, 그리고 메시나 항의 불빛으로 그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의 시칠리아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시칠리아는 나에게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김영하가 시칠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는 순간, 나 또한 현재의 삶에 보다 편안하게 수긍하게 된다. 비록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 채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나를 항하여 언젠가는 데려다 주리라 토닥이며, 떠나 횡행하는 자가 있다면 멈추어 자기 제자릴에서 돌아올 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떠나는 자와 멈추어 있는 자가 모두들 행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김영하 / 김영하 사진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92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