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역사 속에서 더욱 지난했던 가냘펐던 청춘의 이야기...
훌쩍 1930년대 만주땅 동남쪽 구석에 위치한 용정으로 떠나는 젊은 작가의 (라고 부르고 싶은데 벌써 마흔이구나 이 작가도...) 용기를 볼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우리들 역사의 한 켠에 오롯하게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역사의 한 자락을 들추어 팔십여년이 흐른 지금에 되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 청춘들의 지난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 죽음이 지천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기다리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젊음이란, 그들이 푸르른 나무 아래에서 꿈꾸던 세계란, 그 노란 군복 안에 감춰진 살처럼 여리다. 권총 한 발이면 그 살은 부드러움을 잃고 굳어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통영에서 나고 자랐지만 공업학교를 거쳐 지금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용정 사무소에서 측량기사로 일하는 조선인 김해연이다. 조선인에게는 꽤 과분한 자리이기도 한 그만큼 신분 보장을 받고 있는 김해연은 어느 날 사귀고 있던 이정희라는 신여성에게서 쪽지를 받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나락일 수도 있고 통과의례일 수도 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먼저 사랑이 오고, 행복이 오고, 질투심과 분노가 오고, 그리고 뒤늦게 부끄러움은 찾아온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본 헌병들에 의하여 끌려간 그곳에서 김해연은 이정희가 공산주의자이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나카지마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자신을 이용한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며, 나카지마와 이정희가 그렇고 그런 사이이고 결국 이정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마지막 순간 이정희가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만든 쪽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 몸에는 어떤 소망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겁낸 건 바로 눈물이었다. 늙은 나무에 피는 꽃처럼, 내 마른 몸에서 눈물 같은 게 나올까 봐.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인간으로 볼까 봐...”
겨우겨우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던 나는 그러나 이정희가 죽었다는 바로 그곳에서 생을 포기하려 하지만 간도 유격구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진관의 송영감에게 구출되고 (실어증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여옥을 비롯한 그곳 사람들을 통하여 생을 추스린다. 하지만 그렇게 몸과 마음이 회복되던 어느 날 나는 다시금 일본 토벌군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조선인들을 목도하게 되고, 어느새 그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나는 1930년대 그곳에서 있었던 민생단 사건이라는 역사의 한 복판에 위치하게 된다.
“... 1933년 간도의 유격구에서 죽어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간도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객관주의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
조선의 독립과 국제 공산주의 활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했던 혹은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1930년대 만주땅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꽃다운 젊음의 시기에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야 했던 식민지 조국이라는 멍에를 지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인 소설은, 등한시되었지만 알고 넘어가야 할 역사의 한 켠을 다루고 있다.
역사 속의 인물(『꾿빠이, 이상』처럼) 혹은 역사 속의 사건(『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처럼)에 관심을 갖는 작가가 다음에는 또 어떤 곳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인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을 향하여 저공으로 접근하는 대신, 조금은 높게 떠서 보다 다양한 지평을 보려는 듯 이곳 저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작가의 다음번 행보가 궁금하다.
김연수 / 밤은 노래한다 / 문학과지성사 / 345쪽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