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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4시간전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

아마도 소설가와 주인공이 서로의 경로를 묻고 묻히면서...

  소설 《산책하기 좋은 날》은 영화사 컨텐츠 기획팀에서 일하는 내가 주인공이다. 코로나 시국이라 재택을 하는데 집구석에서만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일단 아침이면 카페로 출근을 한다. 일을 하다 점심을 카페에서 해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 일을 하는 형태의 스케줄을 가지고 있다. 집중하여 일을 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드문드문 아래와 같은 상념 메모를 끄적이기도 한다.


  “뭐든지 대충 말하는 게 좋다. 하늘은 파랗다. 거리는 까맣고, 나무는 녹색이고, 사람들은 얼룩덜룩하다. 사람들의 생각도 얼룩덜룩할까.” (p.10)


  그러고 보니 나도 강남에 있는 직장에서 일을 할 때 번잡스러운 테헤란로의 경적 소리를 들으며 메모를 끄적이고는 했다. 비오는 날을 특히나 좋아했는데 십여 층 아래의 다양한 우산 색깔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거처도 서울의 북쪽으로 옮긴 어느 날, 그 건물이 리모델링 중 기둥에 크랙이 발견되어 붕괴 위험에 빠졌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카페에서 기획안을 끄적이다가 BLT샌드위치를 먹은 뒤 은행에 들러서 마이너스 통장 이용 기간을 연장했다. 그 뒤 마이너스 통장에 연결된 카드로 물을 샀는데, 존재하지 않는 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존재하지 않는 돈의 사용 기한을 연장하고 잠시나마 안심했다는 것도 왠지 섬뜩했다. 존재하지만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비트코인이 떠올랐고, 비트코인이 직관적으로 예술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유시민과 정재승의 비트코인에 대한 논쟁을 검색해서 살펴보다가, 예술, 정치, 철학의 미래보다 돈의 미래에 현대인들이 더욱 열을 올리는 현상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한편 한 시대가 져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책에 나섰다...” (p.33)


  소설에는 여러 동네 이름이 등장한다. 적어보자면 이렇다. 묵동, 중화동, 상봉동, 이문동, 월계동, 학동, 송정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동, 당고개, 창동, 월곡동, 종암동, 공릉동, 응봉동, 금호동, 하왕십리동, 행당동, 신당동, 자양동, 광장동, 아천동... 능과 학교도 나오는데 어쨌든 동네만 따로 모아 보았다. 이문동 근처 경희중학교로 전학 온 것이 82년도이고 지금이 2022년이니 서울 생활도 어언 사십 년이니, 나열된 동네 이름이 대부분 익숙하다.


  “... 후배가 보낸 문자를 보낸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추측되는 바는 몇 가지 있지만 민감한 사안이라 적진 않겠다.” (p.60)


  이문동, 월계동, 학동, 송정동, 상계동, 당고개를 챕터의 제목으로 삼는다면 나도 각각 한 꼭지 정도는 쓸 수 있다. 그 동네와 연계된 사연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썰을 풀 생각은 없다. 썰을 풀 생각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소설 속 위의 문장으로 답하리라. 물론 소설에선 ‘적지 않겠다’라고 하였지만, 그 앞에 마음껏 유추할 수 있는 문장 몇 개가 포진하고 있기는 하다.


  “... 공인중개사는 응봉동 말고도 금호동, 행당동, 하왕십리동, 신당동으로 나를 끌고 다니며 달동네 시절에는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물갈이가 돼서 민도가 좋아졌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언제부터 여기 살았냐고 물었고 공인중개사는 평생 금호동에 살았다고 했다. 물갈이가 아직 덜 됐네요, 라고 말하려다 비아냥거리는 거 같아 집값이 많이 올라서 좋으시겠어요?라고 띄워주니 공인중개사는 만족하는 듯했다.” (p.101)


  소설을 자전적 소설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난감하다. 소설가 자신을 절대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소설가가 주인공에게 주인공이 소설가에게, 서로의 경로를 묻고 묻히고 하면서 작성된 소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 산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으로부터 비롯된 영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의 직업이 영화사 컨텐츠 기획자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읽었다.



오한기 / 산책하기 좋은 날 / 현대문학 / 143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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