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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4시간전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확장되는 대신 공유되는 어떤 사랑법의 완결되지 않은...

  「재희」

  “따지고 보면 웃긴 일이다. 재희는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내 정체성이 밝혀지는 데 별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길바닥에서 남자와 키스를 하는 주제에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의 비밀이 재희와 그 남자의 관계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p.52) 이 문장 다음에 나는 덧붙인다 ‘재희니까’라고. 대학 시절의 찬란한 한 때, 서로를 가장 진지하게 이해하면서 가장 진지하지 않은 뉘앙스로 젊은 시절을 보낸 나와 재희의 파란만장한 한 때를 기록하는 소설이다. 여하튼 시간이 흘러 재희의 결혼식에서 나는 핑클 노래를 불렀고, 나의 공대생 K3는 K3를 몰다 사고로 죽었다. K3는 내게 이런 마지막 문자를 남겼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엄마 암이래! 자궁암! 할렐루야다... 하도 호들갑을 떨어 암이 아니라 복권에라도 당첨된 줄 알았다. 그녀는 보름 전 뱃속에 진달래꽃이 만개하는 꿈을 꾼 후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았고 자궁암 확진 판정이 내려졌다. 인맥 관리 차원에서 교회 사람들에게 들어놓은 여러 개의 암보험에서 진단비만 이 억이 넘게 나온다고 했다...” (p.77~78) 우리 소설에서 보기 드문 엄마 캐릭터가 나온다. 물론 현실에서는 드물지 않게 보이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소설의 말미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대상은 엄마이면서 동시에 나의 상대였던 그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데, 여타의 소설과 결이 다른 엄마 캐릭터 그리고 성소수자들의 사랑이라는 소재의 소수성이 대상 결정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본다. 어떤 문장들 그리고 문장의 연결에서는 유치함이 느껴져서 곤혹스러웠다.


  「대도시의 사랑법」

  “자잘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만 크나큰 고난 앞에서는 꽤나 초연한 성격인 나임에도, 카일리와 맞닥뜨린 후 처음 두어달은 정신이 없었어. 의병제대를 하고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이게 내 일이 맞나 싶고, 얘가 내 것이 맞나 싶고. 근데 뭐, 별거 있나. 약이 있으니. 죽을 때까지 아침마다 비타민 한알씩 먹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섹스야 콘돔 끼고 하면 그만인 거고. 다들 교양 차원에서 그 정도는 하고 살잖아? 남들 2년 동안 군대에서 썩을 걸 6개월 만에 끝냈으니까 인생 편해졌다 생각하자, 그러고 말았어...” (p.224) 나는 군대에 있는 동안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의 병에 카일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사귀고 있는 규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규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와 상관없이 우리의 사랑은 여느 다른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러 난관을 겪으며 진행된다. 하지만 중국행을 가로막는 나의 카일리로 인해 규호 혼자 중국으로 떠나며 이 사랑은 아마도 막을 내리게 될 것 같다. 소설의 전반부의 문장들이 갖는 리드미킬함이 독특하였다. 어떻게 이걸 만들었지, 의아해하며 읽었다. 그런데 후반으로 가면서 조금씩 그 리듬감이 무너진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

  “...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짓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pp.307~308)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작 소설이다. 네 편의 소설은 주인공인 나를 공유한다. 네 번째 소설의 나는 태국에서 하비비라는 남자와 함께 하지만 끊임없이 세 번째 소설의 규호를 소환한다. 그렇게 연작소설집이 완성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박상영 / 대도시의 사랑법 / 창비 / 341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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