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식 문장의 찰기에 독자의 혀가 호강하는구나...
김애란의 글은 참으로 찰지다. 김애란의 단어 혹은 문장은 따로따로 성기는 법이 없다. 끈기가 많아 착착 달라 붙어 골고루 그 맛을 낸다. 야무지고 깐깐하기 때문에 허투루 불필요한 맛을 내지도 않는다. 함부로 오버하지도 않고, 딱 적당한 만큼만 튕겨져 오른다. 게다가 이런 맛을 내기 위한 손놀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히 천재적이어서 그녀를 보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깨에 힘빼고 자여~언스럽게, 그녀의 천재적인 행보 앞에 감탄만이 난무할 뿐이다.
「도도한 생활」.
“...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 듯 다시 도- 하고 소리 낸 뒤 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소읍에서 만두 가게를 운영하면서 근근히 살면서 딸에게는 난데없이 피아노를 사준 어머니,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난하게 시작되는 자매의 서울살이에도 얼떨결에 따라붙은 피아노... 이제 막 시작되는 지점들에서 그들은 우리들은 항상 그렇게 조금은 난감하게 우리들로부터 시작된 도- 하는 그 소리에 적잖이 놀라고는 하는 것 아닐까.
「침이 고인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 처음 읽었을 때 난 ‘껌의 찢어진 절단면이 파르르 흔들렸다’라는 문장에 확 꽂혔다. 그리고 이번에 읽을 때는 ‘늦은 건 아니지만 늦을지도 모르는, 세계 고처에 깔린 우리들의 난처한 시간’이라는 부분에서 멈칫한다. 한 방에서 지내던 두 여자의 시간, 그 난처한 시간들은 다시 읽어도 그 난처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성탄특선」.
사내와 그의 여동생이 사는 좁은 방... 그들의 추레하기 그지없는 성탄전야는 그렇게 방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조금은 은근하여 그 누추함이 더욱 부각되는 이 남매의 성탄전야는 그렇게 속절없이 깊어만가고, 그렇게 12월 25일은 ‘사내의 얼굴 위로’ 스르르 나타났다가 ‘푸르게 먹지며 번졌다 사라진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노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곳에서의 생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거리나 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1999년 봄, 노량진에서 보낸 한 시절을 떠올리는 2005년의 나...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아직 바로 그 자리라고 여겨지는, 아직은 뒤돌아볼 여력이 남아 있는 나의 서울살이 혹은 바로 작가 자신의 어떤 시절에 대한 글인 듯하다.
「칼자국」.
“...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둔 나의 마음은 얼마나 절절하리...
「기도」.
신림동의 고시원에 있는 언니에게 어머니의 베개를 전하러 간 여동생... 작가는 우리들의 평균보다 두어 걸음쯤 뒤에서 출발하는 듯한 또다른 우리들을 무심하게 보여주는 데 자질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훨씬 밝아지기를 문장 바깥의 독자인 나는 조용히 빌기도 하지만, 어쩐지 자꾸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작가가 좀더 희망적이기를 바래본다.
「네모난 자리들」.
“...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누군가 광둥어로 부르는 노래처럼 촌스럽고 서정적인 바람이었다. 어머니의 플레어스커트가 분 냄새와 함께 펄럭거렸다. 치마 사이로 판탈롱 스타킹의 살색 밴드가 함부로 보였다. 나는 그 옆에 잠자코 앉아, 어머니의 어깨에 내 조그마한 머리통을 기댔다...” 김애란의 단문들은 짧지만 끊어지지 않고 선연하게 떠오르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공중부양하는 듯한 그녀의 단문들에 실려, 어머니의 옛날과 나의 현재가 서먹하지 않게 섞이는 듯한 소설이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섬의 이름은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오랜 시간 그토록 일관되게 시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로부터 받은 유일한 선물인 ‘시간’만을 가지고 있는 그 섬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과 대마 밭 화재로 시작된 이야기... 작가의 스타일에서 살짝 어긋나 있어서 그런지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밀도가 조금 낮다고나 할까...
김애란 / 침이 고인다 / 문학과지성사 / 309쪽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