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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마사히코 《피안선생의 사랑》

목성이 두 개쯤 끌어당기는 기분 자아내고 싶다면...

by 우주에부는바람 Mar 28. 2025

1996.8.30.


소설을 읽는 동안 근래에 드물게 내 정신은 현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편으로써의 피안에 머물고 있는 여겨지는 피안 선생은 소설가인 나 가루히코의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선생으로 작용한다. 소설의 뒷부분에 나오는 그의 일기를 살펴 보건대 무려 백 사십 명의 여성들과 하반신을 통한 문화적 접촉을 꾀한 선생은 건조한 듯하지만 상대방의 심리적 흐름을 읽어냄으로써 단시간에 또는 걸림돌이 있다면 며칠의 사이를 두고 베드인에 성공하고 마는 서양의 돈 후안 혹은 일본의 히루마 겐지에 (실존하는 인물인지 모르겠으나) 필적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피안 선생은 주인공인 나에게 반면교사의 노릇을 자처하면서 자신을 배울 것과 그러지 말 것을 동시에 종용하고, 긴 줄에 주인공이나 그가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을 묶어 둠으로써 피안 선생이되 이쪽 세상에 깊숙하게 발을 디디고 있다.


결국 피안 선생은 진짜 저쪽의 세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정신병원의 이마이라는 기사에게 스스로 수업을 받지만 그가 죽자 다시 이쪽의 세계로 돌아오고 소설의 마지막은 이런 선생을 향하여 티벳에서 날아오는 교코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피안과 차안, 저쪽의 세상과 이쪽의 세상, 내세와 현세가 확실히 나뉘어 있는 것일까. 현세의 생활 속에 내세가 있고, 저 세상은 이 세상과 맞닿아 있고, 피안과 차안이 은근슬쩍 이어져 있는 듯한 티벳, 그곳에서의 편지로 끝이 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날렵해 보이는 구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도쿄, 하지만 그속에서도 언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티벳으로 은유되는 피안의 영역, 피안 선생은 결국 그 피안을 향한 연민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은 피안 선생이 행한 모든 연애 행각과 뒤엉켜 있다.


일본인 특유의 (작가는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의 제스처를 군데군데 보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감각이라고 해야 할런지, 나이 먹는 작가의 현실 순응이라고 해야 할지 피안 선생은 결국 자신의 하나 뿐인 아내 치에코에게 돌아옴으로써 자신을 수긍하고, 소설의 독특한 형식은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을 몸으로 패러디한 것이라는 작가의 말로 책은 갈무리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원시 수프에 대한 문장처럼 난삽하지만 정교한 소설이다.


"밤 국수 장수가 다닐 정도로 옛날부터 야행성 게으름뱅이의 주식은 라면이게 마련이지. 라면의 수프에는 고분자 상태의 망상이 녹아 있어. 밤의 망상은 푹 삶은 상념으로부터 올라오는 수증기 같은 것이지. 지구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원시 수프에서 태어났어. 그즈음의 기억이 뇌 깊숙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질서잡힌 생각을 교란시키고 혼돈으로 되돌려보내지. 밤이 되면 모두들 저 원시 수프로 돌아가는 거야. 라면 수프는 어딘가 원시 수프를 생각나게 해. 식당에 들러 드럼통에 푹 삶아 만드는 그 수프를 들여다본 적이 있나? 야채, 향신료, 고기, 뼈, 지방, 어패류.....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져."


여하튼 그의 작품들을 꽤 좋아하는데, 근래에는 볼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96년도에 읽은 소설인데 지금 읽어도 아마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재밌다고 여긴 문장들 몇 개 옮겨 적는다. 괄호 안은 내 심경.


"그날 밤은 낫처럼 날카로운 초승달이 떠 있었다."


(왠지 심난한 밤이다, 라고 하는 것보다 백배쯤 잘된 표현 아닌가.)


"...나는 아직도 그녀에게 감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교코씨와 벌인 하룻밤의 사건은 마치 사토코의 정절이 흐트러졌을 때, 이쪽이 예방하기 위한 예방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연애 감정의 심층부 내지는 조악한 일면을 잡아내는 데에는 경험만한 것이 없다.)


"홀가분하게 살고 있구만. 택시로 이사가 되니. 내게 걸려 있는 중력과 네게 걸려 있는 중력은 목성과 달만큼이나 달라."


그의 말뜻은 이해가 갔다. 아그네스와 만나기 전에는 분명히 달 표면에 있는 것처럼 홀가분했지만, 지금은 지구만한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녀와 결혼이라도 하는 날에는 역시 나도 목성만한 중력에 시달릴 것이다.


(목성이 두 개쯤 날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 속에서 몇년째 살고 있다.)


"꽤 흥이 나서 술을 마시고 나니, 침대 속에서 흥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왕성하게 하여 <아그네스는 나의 아내인데, 한국인 야채상과 밀통하고 있다. 그 모습을 내가 붙박이장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다>라고 하는 상황을 설정해 봤더니, 힘차게 발기되었다. 나는 천재가 아닐까."


(비슷하게 따라해 보았으나 명백한 실패였다. 그나마의 발기마저 원위치로 추락하는 정도. 나는 천재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바보가 아닐까.)" 



시마다 마사히코 / 피안선생의 사랑 / 민음사 / 1996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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