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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외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층위의 구분 없지만 일목요연하지도 않은 길을 따라서...

by 우주에부는바람

최은미 「김춘영」

“광부들은 신분증 격인 소속 광업소의 인감증을 내걸고 술을 마셨다. 그러면 다음달 월급은 그 술값이 공제된 채로 나왔다. 화운갱 광부의 아내들은 남편의 월급봉투를 김춘영과 나눠 가진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pp.25~26) 탄광에서 있었던 노동쟁의 그리고 면담자와 구술자로 이어지는 역사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술자가 광부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던 술집 주인이라는 사실이 다른 작품들과 결이 다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나는 이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모의 짧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촉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나는 주삿바늘이 잔뜩 꽂힌 이모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손에 내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냄새가 화악 밀려들었다. 시큼하고 부드러운 살내음. 이모의 옷에는 늘 그 냄새가 배어 있었다...” (p.104) 막내 이모를 닮은 나는 막내 이모의 죽음 이후 그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이 어린 여자를 만나는데, 그녀는 내가 이모와 소원하였을 때 이모의 곁에 있었던 여자이다.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영어 사전에 의하면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우주의 성과학이라고 했다...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우주의 성과학’ ‘지구 외부 생물체의 성에 대한 연구’라고 했다... 우주 성학은 우주 탐사와 외계 환경에서의 인간 관계, 성별 역학 및 성 행동에 관한 연구라는 좀더 그럴싸한 설명을 읽게 되기는 했지만...” (pp.136~137) 유자는 ‘내딸은율’과 함께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은율이 기획한 전시회의 이름이고, 모든 것을 잃고 은율의 집에 얹혀 사는 유자는 딸이 집을 나간 다음 몰래 그 전시회에 대해 알아본다.


김혜진 「빈티지 엽서」

“... 그녀는 친절과 선의가 완성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을 배웠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친절과 선의는 있는 그대로 주고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만 유효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염되고 변질되고 공중분해 되면서 자신 혹은 상대를 다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누구나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취약했고 위험했고 다루기 까다로웠다.” (p.161) 일상의 빈틈을 파고드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우리의 삶은 ‘사소한 용기가 부족’하여 지금에 도달했다고 말하다가, 곧이어 ‘이렇게 사는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늘 더 큰 용기를 냈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타협과 비타협의 순간에, 모든 정지와 출발의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며 살았다, 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배수아 「눈먼 탐정」

“나는 그의 이름을 알았지만, 그는 이름 대신 ‘눈먼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소망했다. 왜 하필이면 눈먼 탐정인지, 처음부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는 불현 듯 떠오른 어휘에서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예감을 얻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름 혹은 위장된 이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p.191) ‘눈먼 탐정’이라는 아이러니 가득한 명사가 재미있지만 소설 자체는 썩 그렇지는 않다. 최소한의 줄 바꾸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는 것 자체를 고역으로 느낄 수도 있다. 사건도 대화도 최소화하면서 배수아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최진영 「돌아오는 밤」

“... 너는 그래서 문제야. 너는 그래서 안 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 말을 매일 들었고... 일 년 십 개월을 버텼다. 회사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경력을 만들었다. 그 경력이 이직에 도움이 되었다. 두번째 직장의 사수는 종종 물었다. 이전 회사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거야?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배척하고 싫어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 또한 배웠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직장에서는 이 년을 버텼다...” (p.249) 바로 그 시기 나를 위로해주었던 친구 이향기가 죽었고, 나는 그 슬픔을 달랠 시간 여유조차 없이 사장의 오랜 은인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영국을 다녀왔다.


황정은 「문제없는, 하루」

“내가 저지른 일은 아닌데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은 아니야. 난 요즘 어딜 봐도 그런 생각을 해. 안전한 데가 없어.” (pp.308~309) 영인과 동생인 인범이 나눈 대화 중에 나온 문구이다. 이건 그러니까 일종의 나비 효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도 떠올랐는데, 어쨌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순간 꿈틀꿈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총합이 (나만 문제 없을 뿐, 우리 모두 문제인) 지금 여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은미, 강화길, 김인숙, 김혜진, 배수아, 최진영, 황정은 /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337쪽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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