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빼놓고는 전부 과거의 것’이라는 말을 앞에 놓고 괜스레 먹먹해져.
책의 서문, 그 첫 단어로 작가는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사자성어를 가져왔다. ‘공손이나 겸양도 지나치면 오히려 예의가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친절히 설명한다. 오래전 젊은 시절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이 된다, 라며 나를 꾸짖던 선배가 있었던 것 같다.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작가가 제목에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도 이 서문을 통해 어림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타자화되어 고통받고 있는 존재에 대한 공감, 혹은 공감하려는 노력이 없는 자가 ‘진보’의 이름을 참칭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그것은 진보가 애초의 기원에서 벗어나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심지어는 타자를 윽박지르는 억견으로 화석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욕한다고 진보가 아니다. 미국을 욕하고 친일파를 비난하는 게 진보가 아니다. 평화통일주의자가 진보가 아니다. 권력층과 부유층을 저주하는 게 진보가 아니다. 그것이 그로 말미암아 고통받는(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로 인해 타자화됨으로써 고통받는) 존재에 대한 간절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자기성찰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그런 태도들은 진보적인 태도가 될 수 있다.” (p.215)
학창시절 한때 민족문학 아닌 것, 노동문학 아닌 것에 강한 반감을 가진 적이 있다. 그렇게 학습 받았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길지 않은 한때였지만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에 대한 반감으로 하루키와 류 등에 경도되었던 것 또한 그 트라우마의 일종이랄 수 있겠다. 그때 읽고는 하였던 평론가들 중에 김명인이라는 작가의 이름 석 자도 들어 있었다.
“... 김광석은 내게 언제나 슬픔의 귀신이다. 그의 노래는 내 귀에 들이붓는 슬픔이다. 예전에는 슬픈 노래만 슬펐는데, 이제 그의 노래는 아무거나 다 슬프다. 그의 노래를 듣는 내 마음은 언제나 흐느낀다.” (p.119)
아마 그때 작가는 꽤나 젊었고 혈기에 넘쳤을 것이다. 나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는 이제 환갑을 앞두고 있고, 나는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그의 글을 만나, 읽기 시작하였다. 책에 실린 글들은 바로 그 페이스북에 작가가 작성하였던 글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서문에는 그렇게 그곳에 작성하여 이미 읽힌 글들을 다시 책으로 엮는 일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겸연쩍음도 얼핏 드러난다.
“... ‘꼰대질’이란 곧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로 무득권층 일반에 대해 억압적이고 유사계몽적 훈육 논리를 내재화하고 동시에 자기(의 경험과 의식)를 특권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계급이 되었든, 계층이 되었든, 세대가 되었든, 젠더가 되었든, 나의 ‘사회적 타자’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상하관계에 서는 대신 수평관계에 서서 그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첫걸음을 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pp.236~237)
작가도 작가의 글을 읽던 나도 이제 꽤나 나이를 먹었다. ‘꼰대질’이라는 단어에 민감히 반응하기에 충분하다. 종종 까페 여름에 들르곤 하는 칠십 세의 조한혜정 선생과 잠시 무릎을 맞댄 적이 있다. 별다른 생각 없이도 믿고 따를만한 어른 혹은 어른의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선생님은 자신이 속한 어느 위원회를 거론하며 그곳에 가면 자신이 막내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물러남에 대해 좀더 첨언을 하였다.
“이 진퇴유곡 속에서 김사인이 자기를 구해달라고 부르는 대상들이 있다. 고향, 어머니, 애인, 먼저 죽은 김태정, 박여은, 신현정, 여운 등 시인 예술가 친구들, 그리고 죽음 혹은 소멸 그 자체다. 죽음 빼놓고는 전부 과거의 것이다...” (p.141)
힘을 뺀 듯하지만 그래서 힘이 느껴진다면 어떨까, 물의 표면에 손바닥 댄 것일 뿐이지만 그 깊이가 짐작이 된다면 어떨까... ‘죽음 빼놓고는 전부 과거의 것’이라는 말을 앞에 놓고 괜스레 먹먹해져 한참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였다. 좋은 읽을거리 그러면서도 쉬운 읽을거리가 흔치 않은 시절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 중 하나의 단어 아니면 하나의 문장, 운이 좋다면 하나의 페이지나 하나의 꼭지에 마음이 박힐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지극하다.
김명인 / 부끄러움의 깊이 / 빨간소금 / 284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