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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사육 외 22편》

전후 정신으로부터 시작된 어쩌면 일본 사소설의 위대한 경향...

by 우주에부는바람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단편이든 장편이든) 한 편도 읽지 않았다. 몇 권 정도는 집에 작가의 책이 있으니 혹시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들 중 하나를 읽었다는 기억이 없다. 작년 말에는 부러 고려원에서 1996년 발간된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을 중고로 사기까지 했는데 그것도 아직까지 읽지 못한 참이었다. 그러다가 이번 단편선집을 샀고,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끝까지 읽었다.


소설집에는 2013년 《만년양식집》을 간행한 후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밝힌 오에 겐자부로가 이번 책의 발간을 위하여 직접 고른 스물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1957년에서 1964년 사이에 발표된 단편, 1980년에서 1990년 사이에 발표된 연작 단편, 그리고 1988년과 1992년 사이에 발표된 단편들이 초기 단편, 중기 단편, 후기 단편이라는 챕터로 나뉘어져 실린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선집이다. 내게는 초기 단편들이 가장 좋았다. 중기 단편들은 놀라웠고, 말기의 단편들은 조금 어려웠다.


Ⅰ 초기 단편


「기묘한 아르바이트」

그러니까 이런 식인 거다, 좋은 소설이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가 없는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개를 사랑한다는 개백정과 개를 죽이는 작업을 돕는 세 명의 아르바이트생 중 한 명인 대학원생의 서로 다른 생각 중 어느 한 쪽으로도 발을 들이밀 수가 없다. 여기에 분노를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내가 있다. 이것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사회 전체가 빠져 있는, 좋든 싫든 이미 정착되어버린 문화 (개백정의 문화든, 매춘 문화든, 기업 문화든)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여학생까지...


「사자의 잘난 척」

“이 사자들은 죽은 다음 바로 화장되는 사자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난 다음 바로 화장된 시체는 이토록 완벽한 ‘물체’가 되어 보지 못하는 거다... 거기에는 완전하게 물체화될 시간이 없다... 그래, 우리는 바로 ‘물체’다. 그것도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완전한 ‘물체’다. 죽어서 바로 화장된 남자는 ‘물체’의 양감, 묵직하고 확실한 감각을 모르겠지.” (p.36) 수조에 잠겨 있는 사자死者들을 옮기는 작업을 아르바이트로 하게 된 나는 그렇게 사자들을 옮기면서 간혹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개를 잡는 직업을 가진 개백정과 마찬가지로 시체를 관리하는 일을 평생에 걸쳐 해온 관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여학생은 현재 임신 중이다.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통해 벌은 돈으로 아이를 뗄 생각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어느 순간 헛수고가 되고 만다. 삶과 죽음, 시체와 뱃속의 태아, 일과 잘못된 일 등 여러 아이러니가 짧은 소설 안에서 부딪친다.


「남의 다리」

“우리는 점액질의 두꺼운 벽 안에서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족므 이상한 감금 상태이긴 하지만 우리는 결코 탈주를 꾀한다든지 외부 소식을 알고 싶어 안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종의 강제수용소에 갇힌 셈이었지만 그 점액질의 투명한 벽에 깊은 금을 내고 도망치려는 생각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p.69) 척추결핵으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소년 소녀가 있는 요양소에 한 학생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학생은 이들을 추동하여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려고 애쓴다. 요양소에는 변화가 생기지만 나는 그것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만 그러고 싶어하는 마음 조차 들키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학생이 다시 걷게 되는 순간, 그렇게 그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순간, 요양소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사육」

“우리 마을 아이들은 완전히 검둥이 군인의 포로가 되어 모든 생활의 구석구석을 검둥이 군인으로 채웠다. 검둥이 군인은 전염병처럼 아이들 사이에 퍼지고 침투했다...” (p.123) 산골 마을 근처에 추락한 비행기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힌 흑인 군인... 그러나 점차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군인에게 익숙해지고, 그를 가두던 상황이 느슨해진 찰나 갑작스럽게 군인은 반격을 혹은 마지막 저항을 펼친다. ‘나는 갑작스러운 죽음, 죽은 자의 표정, 때론 슬픈 표정이고 때론 웃는 표정인 그런 것들에 급속하게 익숙해져 갔다...“ (p.149) 전쟁에 대한 은유가 검둥이 군인의 사육 혹은 그 군인에게 호기심을 느낀 이들이 역으로 당하는 사육, 그리고 폭력과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현실로 그려지고 있다.


「인간 양」

아마도 패전 후 일본,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버스에서 미군들의 횡포, 남자 승객들의 바지를 벗기고 양처럼 엎드리게 만든 후 노래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미군들이 내린 후 양이 되어야 했던 승객들과 그런 그들을 바라만 보았던 승객들 사이의 간극은, 미군들과 양이 되어야 했던 승객들 사이의 위계 만큼이나 멀어 보인다. 굴욕과 수치로도 모자라 그 굴욕과 수치가 또 다른 수난에 봉착하고 마는 기막힌 이야기이다.


「돌연한 벙어리」

산골 마을에 미군 여럿과 일본인 통역이 지프를 타고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이 웅덩이에서 멱을 감는 동안 통역의 구두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이 작은 사건은 그러나 점차 부풀어 오르더니 결국 소년의 아버지인 이장이 죽는 사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날 밤 소년을 따라 다시 웅덩이를 찾은 통역은 죽음을 맞는다. 그들이 들어올 때와는 달리 이제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 마침내 지프는 방향을 돌리더니 마을로 들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갔다. 마을의 인간들은 아이들을 포함해서 누구하나 본 척도 하지 않고 극히 일상적인 동작을 계속했다. 길이 마을에서 벗어나는 곳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개의 귀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외국 군인 중에 가장 투명하고도 파란 눈을 한 남자가 과자 묶음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여자애와 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하던 놀이만 계속했다.” (p.191)


「세븐틴」

전후 혼란으로 가득한 일본, 자위를 하는 자신을 유약한 존재로 몰아가며 비하를 일삼던 열일곱 소년이 어떻게 우익인 황도파의 일원이 되어 가는지를 다루고 있다. 자기 비하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것 같은 세상을 향한 소년의 분노는 황도파 우두머리가 거리에서 내뱉는 저주의 목소리를 통해 힘을 부여받는다. “악의와 정의라는 흉포한 음악이 재생 장치를 파괴할 정도의 볼륨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연약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저들을 다 죽여 버려라. 그것이 정의다...” (p.238) 그렇게 황도파의 애국 소년이 된 나는 이제 시위 중 여학생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전원 학살을 맹세하는 너무나 행복한 유일한 세븐틴’이 되었다. 시대에 제대로 책임을 지는 어른들이 없다면, 아니 그 시대를 거스르는 어른들이 잘못된 분노의 씨앗을 퍼뜨릴 때, 이 생동감 넘치는 소년은 어른들보다 더욱 빠르게 악의 화신이 되어간다. (소설을 읽는 동안 사제 폭탄을 강연장에서 터뜨린 일베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의 손아귀에 흉기를 들린 어른들, 이후에도 이 소년을 영웅으로 치켜세웠던 어른들이 떠올랐다. 오십여 년 전의 일본과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닮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공중 괴물 아구이」

십여 년 전 나는 한쪽 눈을 잃었다. 그리고 그 직전에 내가 하였던 어떤 아르바이트에는 뭔가 이상한 요소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음악가의 외출에 동행하는 일을 하는데, 실제로 나를 고용하는 것은 그 음악가라기보다는 그 음악가에게 가끔씩 내려오게 되는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면으로 된 속옷을 입은 굉장히 커다란 아기라고 하더군요. 거기다 거의 캥거루만 한 크기랍디다.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그 괴물 아기는 개아 경찰을 무서워한대요. 이름은 아구이라고 하고...” (p.271) 나는 음악가와 동행하면서, 그리고 그에게 그것이 내려오는 것을 가끔 허상으로 확인하면서 그에 대해 알아간다. 음악가의 전처, 그리고 태어나고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였던 음악가와 전처 사이의 아이, 그리고 음악가의 애인에 이르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공중에서 내려오는 괴물 ‘아구이’로 표현되는 음악가의 ‘그것’의 정체, 그 정체모를 무엇은 누군가에게는 희미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뚜렷하다. 하지만 ‘그것’을 희미하게 느끼는 우리들 중 누구든 어느 순간 ‘그것’을 뚜렷하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은유로 가득한 사인 같은 소설이다.


Ⅱ 중기 단편


연작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슬기로운 ‘레인트리’」 (연작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1)

“... 나는 외국에 나올 때마다 그 풍토에서 정말로 그 토지다운 수목을 보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그 나무를 부르는 고유한 이름을 알아야 비로소 그 나무를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며 나무와 교감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인은 크리슈나가 기어올라 가는 이 나무를 인도보리수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이 나무를 단지 Fircus religiosa Linn이라는 학명으로 분류하는 것과는 또 다른 하나의 표현 행위죠. 학명은 단지 나무에 관한 설명일 뿐이고 나무의 이름과는 다른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아가테는 이 지역 사람들이 이 나무를 뭐라고 부르는지 설명해 주었다... ‘레인트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밤에 소나기가 내리면 다음 날은 한낮이 지날 때까지 그 우거진 잎사귀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기 때문이에요. 다른 나무들은 비가 와도 금방 말라 버리는데 이 나무는 잔뜩 우거진 손가락만 한 잎사귀에 물방울을 저장해 두는 거죠. 정말 슬기로운 나무 아닌가요?” (p.307) 하와이 대학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나는 세미나 뒤에 이어지는, 한 정신과 병원에서의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가테라는 후원자를 만나고, 그녀를 통해 레인트리를 보고 듣는다. 더불어 참가한 지식인들을 비롯한 이들의 토론을 흥미롭게 보고 듣는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순간, 이 지적 열기로 가득하였던 상황을 꾸미고 진행시킨 것이 실제로는 그 병원에 입원 상태인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는 혹은 우리는 결국 슬기로운 ‘레인트리’의 정체를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게 된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연작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2)

사실과 소설이 실재하는 것과 만들어진 것이 이처럼 유려하게 뒤섞이기도 힘들 것이다. 소설은 내가 1년 전에 쓴 「슬기로운 ‘레인트리’」라는 소설에 대한 뒷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소설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곳에서 내가 만났던 대학 시절의 친구 다카야스 갓짱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이 이번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전 소설이, 그때 하와이의 어느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파티에서 한 여인의 손에 이끌려 나가서 보게 된 혹은 보았을 것이라고 여긴 그러나 볼 수가 없었던 나무 ‘레인트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번 소설은, 그때 하와이에서 내가 겪은 일이고, 그것이 이전 소설의 어떤 모티프가 되기는 하였으나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소설에 사용되었던 것이 ‘레인트리’라는 어떤 은유였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레인트리라는 어떤 은유’에 대한 어떤 은유라고 볼 수 있을까... 이십여 년 전 PC 통신 시절,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과 함께 일종의 성전처럼 회자되었던 것이 바로 오에 겐자부로의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이 두 글들을 읽지 않다가 최근에야 읽었다. 그리고 그때 읽었어야 했어, 라는 후회의 마음과 그때 읽었다면 지금과 같은 감응의 경험이 가능했을까, 하는 다행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여하튼 지금이라도 읽어서 좋았고, 당신들도 그러면 좋겠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은 꼭 「슬기로운 ‘레인트리’」를 읽은 이후에, <미국의 송어낚시>는 <워터멜론 슈가에서>와 함께...


「거꾸로 선 ‘레인트리’」 (연작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4)

나는 다시 한 번 하와이를 방문하게 되었다. 세미나, 그리고 하와이 지역 핵반대 그룹과의 미팅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두 가지 모두 성공적이지 않았다. 대신 나는 죽은 다카야시의 남겨진 부인은 페니와 만나고 그녀를 통해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아들이 다카야시의 노트를 가지고 음악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문명권 인류의 대부분은 세피로트 나무를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무서운 기세로 지옥, 즉 클리포트로 떨어져 내리는 거죠. 다카야스는 그렇게 믿고 죽었어요. 나도 그렇게 믿고 살고 있죠. 다카야스는 《뉴스위크》 표지에 나왔던 원폭의 버섯구름 사진을 오려서 초고 노트에 붙였었죠. ‘거꾸로 선 세피로트 나무’라고 주를 달아서, 라우리의 인용도 같이. 재커리 K의 이번 LP에는 직접 그 면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가 들어 있어요.” (p.418) 일종의 계시가 담긴 묵시록에 가까웠을 다카야시의 노트, 그리고 현대 사회가 핵을 다루는 (주로 반대하는 그룹의) 여러 층위가 묘하게 겹쳐지며 소설은 진행된다. (연작 소설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맬컴 라우리라는 소설가에게 관심이 간다. 소설에도 등장하는 《화산 아래서》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소설집에는 레인트리 연작 중 세 편이 실려 있다. 지난 겨울 중고로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을 구매하였으나 아직 읽지 않고 있는 참이었다.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소설을 그 책에서 찾아 읽어야겠다.)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순수의 노래, 경험의 노래」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1)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선뜻 읽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아들이 가진 병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증의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아들과 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대표작 《개인적 체험》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하드 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영화 또한) 쉽게 읽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그조차 쉽지 않다) 그렇지 않고 실제하는 일들 중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쉽게 읽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번 소설에는 작가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소설집 전체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고 연작 소설집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이 맬컴 라우리라는 작가를 곳곳에 분포시키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 소설이 들어 있는 연작 소설집 《새로은 사람이여 눈을 떠라》는 블레이크의 시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다. “...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아들이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인 나도 언젠가는 내게 닥칠 죽음과 그 후에 혼자 남겨질 아들과 세상, 사회, 인간의 관계에 관해 두려워하지 말고, 또 나태함에 빠지는 일 없이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p.443) 소설에는 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아들, 그리고 돌아온 아버지를 천천히 다시 인식하기 시작하는 이 부자의 이야기와 내가 여행 중 만났던 H의 눈에서 발견하였던 ‘비탄’의 정의가 공존한다.


「분노의 대기에 차가운 갓난아이가 솟아올라」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2)

“... 아들의 간질은 내가소년 시절 황어 집단 서식지에서 머리에 입은 부상이 초래했을지도 모를 나의 간질을 떠안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아들의 두개골에 결손이 있는 부분과 같은 자리에 있는 내 머리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황어 집단 서식지에서 출현했던 거대한 힘이 아들의 기형적인 탄생을 초래한 것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p.479) 나의 어린 시절 죽음의 순간까지 다다르게 만들었던 수며 아래에서의 기억, 그리고 그러한 나를 구하였던 어떤 힘을 지금,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이의 간질 증세의 원인과 매치시키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독자인 나도 팔에 커다란 화상 자욱이 있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일어난 사고와 수술을 앞두었던 어머니를 연결시키고는 하였다. 내게 일어난 사고가 어머니에게도 발생했을 수도 있는 불상사를 방지해 주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겪었던 수술, 그리고 인과 관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한 장애, 그리고 그러한 아들이 어느 순간 관심을 갖게 된 죽음,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부부의 자책... 많은 것들이 소설 안에서 리얼하게 거론되고 있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절규하며······」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3)

특수학급의 수영 선생이 포기한 아들과 함께 가는 수영장에서 마주치게 된, M선생의 (아마도 미시마 유키오) 추종자들인 서른 안팎의 청년들,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슈무타 선생과의 일화로 이루어져 있다. “... 그 M의, 목이 잘린 ‘머리’의 힘이 청년들을 부추기고 있는 거라면 나도 거꾸로 ‘머리’의 힘에 위축되지는 않을 테다,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머리’의 힘에 대항해야 한다. 이 억세고 다부진 사병들에게 밀려 이요 앞에 녹다운 당하는 한이 있어도...” (p.509) 허무주의와 탐미주의에서 우익 인사로의 전환, 그리고 할복 자살로 이어지는 유키오의 사상은 어떻게든 일본 사회의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고, 아마도 작가는 이를 환기시키려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계몽의 방식은 아니다. 내가 경원시하는 슈무타 선생에게 결국 도움을 받게 된다는 설정이 결말에 도사리고 있다.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7)

“...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단편은 블레이크와 아들에 관한 소설인 동시에 「레인트리」 소설의 마무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인트리’ 속으로, ‘레인트리’를 지나서, ‘레인트리’ 저 너머에. 이들 언어를 써넣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와 이요의 죽음이었다. 이미 합일을 이루었으나 개체로서 더욱 자유로운 귀환한다...” (p.522) 두 개의 연작 소설집이, 나중의 소설집이 이전의 소설집에 자꾸 가서 닿는다. 여행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 와중에 일본에 남겨진 나의 아들 이요가 부지불식간에 등장한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라는 존재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연작 「조용한 생활」


「조용한 생활」 (연작 「조용한 생활」 1)

이번 소설 또한 아들 이요가 등장한다. 다만 화자가 바뀌었다. 이요의 아버지인 나 대신 이요의 누이인 내가 나선다. 장애를 가진 이를 둔 가족들이라면 한 번쯤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 몸의 성적인 성숙과 이를 따르지 못한 머리의 미성숙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안내인」 (연작 「조용한 생활」 3)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스토커> (우리나라에서는 <잠입자>라는 제목으로 소개)를 본 이요의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이요... 영화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아이’라는 존재와 이들 가족에게 있어서 이요라는 존재... 영화 한 편을 보는 순간에도 이들 가족은 이요라는 존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일상의 부자유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지평(?)을 넓히는 데 활용한다고나 할까...


연작 「하마에게 물리다」


「하마에게 물리다」 (연작 「하마에게 물리다」 1)

어느 산장에서 내가 읽게 된, 우간다의 국립공원에서 하마에게 물렸다는 한 청년에 대한 기사,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하마 용사’와의 편재 왕래와 그의 어머니 마담 ‘하마 용사’와의 오래전의 기억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 적군파에 의한 ‘아사마 산장’과 연류되어 있었던 열일곱 청년 ‘하마 용사’가 그 사건이 일어난 산장에서 담당하였던 분뇨 처리, 그리고 그러한 분노 처리에 상당히 고무적인 관심을 가졌던 내가 그와 편지 왕래를 하게 되었다거나, 하마가 생태계에서 담당하는 순환의 역할을 통해 이후 이 ‘하마 용사’ 청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등의 연결고리가 무난해 보인다.


「‘하마 용사’와 사랑스러운 라베오」 (연작 「하마에게 물리다」 3)

“언니는 어쨌든 마르크스주의자였으니 최후의 순간까지 미래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죽었을 거다. 그런데 언니의 전 동지가 자살하거나 또는 자기비판을 하는 걸 보면 미래의 파라다이스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중에서도 혼자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당신에게 희망을 걸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p.653) '연학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에 의해 처형된 마르크수주의자 언니를 둔 그녀가, 이제 그 사건의 일원이었으며 지금은 아프리카에 머물고 있는 ’하마 용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나는 <하마에게 물리다>라는 단편을 씀으로써 이 두 인물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하나의 단편 소설, 그리고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다른 단편 소설을 쓰게 된다는 형식은 ’레인트리‘ 연작을 닮아 있다. 적군파라는 극단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작가가 답을 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 그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어떻게든 이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 일조했으면 한다는 작가의 의중은 떠올릴 수 있다. “... 강물 속에서 녹색 물풀이 자라나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면 강이 범람하게 된다. 물속에서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하마가 바로 그 물풀 덩어리에 구멍을 만들어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준다. 하마에게는 또 라베오라는 귀여운 물고기가 붙어 다니는데 하마가 육지에서 떨어뜨리는 식물이나 하마 똥을 먹는다. 그렇게 해서 하마는 아프리카 자연 속에서 생물의 먹이사슬 기능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p.657)


Ⅲ 후기 단편


「‘울보’ 느릅나무」

벨기에에서 만난 N 대사와의 일화로부터 시작된 소설은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느릅나무와 관련한 어떤 희미한 사건, 그리고 N 대사의 죽음 이후 내가 한 조사로 이어진다. 소설은 결국 N 대사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쓴 조사의 내용 중, 그 N 대사가 내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일종의 증명서 같기도 하다.


「벨락콰의 10년」

《신곡》의 등장인물들 중 하나로 ‘예측 불가한 게으름뱅이’ 캐릭터인 벨락콰, 한 독자로부터 소설에 대한 독특한 지적을 받고, 그 지적에 벨락콰가 등장하고, 동시에 오래전 자신에게 이탈리어를 가르쳤던 유리에와의 일화를 떠올리게 되는 나...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여왕 마고가 차고 다녔다는 치마 속의 비밀 주머니와 그 안에 담겨져 있었다는 애인들의 심장, 그리고 카메라맨 시노가 좋아하였던 필리핀 여인 마리아의 비밀스러운 트렁크... 聖과 性, 종교적인 경건함과 세속적인 성행위의 음란함, 이 두 가지가 지니고 있는 거리감을 줄이는 소설이랄까...


「불을 두른 새」

<휘파람새 - 어느 노인의 시> 라는 제목의 이토 시즈오의 시, 그 시를 보고 감명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나로부터 그 시에 대한 스기모토 씨의 해석을 읽은 지금의 나에까지 이어진 것은 무엇일까... 鶯(꾀꼬리 앵)이라는 휘파람새의 한자어에서 불이 둘러진 새를 떠올리고, 또 그 새와 함께 떠올려지는 인물들로 한 편의 소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 박승애 역 / 사육 외 22편 / 현대문학 / 774쪽 / 2016 (1957~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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