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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May 20. 2024

연극 『파우스트 엔딩』 온라인 관람 감상평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훌륭하다!'


연극 『파우스트 엔딩』의 온라인 관람을 마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실제 극장에서 보았다면, 기립 박수를 넘어 옆 구르기 박수를 쳤을 것이다. 이후 뒤풀이 장소에서 극단 부대표님이 내게 감상평을 여쭈었다. 나는 기다렸단 듯이 내 생각을 쏟아 냈지만, 다소 철학적인 내용에 가라앉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닫았다. 그런데 그 짧은 감상평이 부대표님의 마음을 흔들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부대표님은 『파우스트 엔딩』의 감상평 작성을 부탁하셨고 나는 기껍게 수락했다.


이러다 배우는 고사하고 후기 전담 단원이 되는 건 아닐까 불안감도 엄습하지만, 누군가가 내 생각에 관심을 가지는 건 매우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다. 우리는 서로의 외모, 배경, 재산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서로의 생각에는 별 관심이 없다. 실제 우리가 우리다울 수 있도록 하는 건 우리 자신의 생각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이 많다. 더불어 내 생각을 말할 기회가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 나를 드러낼 기회를 주신 부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후기를 시작한다.


고뇌에 빠진 파우스트


나는 『파우스트 엔딩』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극에 빠져들었다. 특히 파우스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그녀를 괴롭히는 실존적 공허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여러 학문을 섭렵했지만,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신의 한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우린 모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이런 의미 추구는 개인마다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데, 나로 예를 들자면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을 향한 욕구가 있다. 우리가 지식을 전달하는 TV프로에 빠져드는 이유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욕구가 유독 강하다. 솔직히 인생살이에 하등 쓸모없는 지식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에 나 자신을 쉽게 투영할 수 있었던 건, 나 또한 그녀처럼 지식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만이 드러난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결국 방황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의미를 상실하면 마음이 무너진다. 악마로 등장한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와 그녀의 제자들에게 무의미를 주입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메피스토는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무의미에 늪에 빠지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바로 무기력과 집착이다. 둘은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의어나 다름없다. 단지 열정을 쏟을 에너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는 극초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무기력했던 파우스트가 젊음을 되찾고 완전한 세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 파우스트는 그렇게 자기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고자 한다. 결국 그녀가 추구한 사랑, 학문, 권력은 이런 집착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괴테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완벽'을 향한 집착이 어떻게 인류의 종말을 초래하는지, 파우스트의 서사를 통해 괴테는 말하고 있다. 극에서 인류의 종말은 인간이라는 종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완벽한 법, 완벽한 사상, 완벽한 체계, 완벽한 지식이라는 허상이 어떻게 인간성을 무너트리고 파괴하는지를 말이다. 메피스토가 인간에게 호문쿨루스의 탄생을 부추겨 신의 영역을 침범하도록 한 것은, 완벽에 다가갈 수 있으리란 인간의 교만이 곧 인간성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의 마지막 인간성이었던 아기가 완벽한 존재로 거듭나면서 인류세는 막을 내린다.


우리는 '완벽'을 향한 집착이 인간성을 무너트린 사례들을 익히 알고 있다. 우생학, 홀로코스트, 전체주의, 이 모두가 인간 스스로 완벽한 인간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나 도그마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반증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멈추고 마음껏 통제하고 조절하여 더 나은 곳으로 재구축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호문쿨루스가 의미하는 바를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르는 척 시선을 돌릴 뿐. 마치 극 중 메피스토의 대사처럼 말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요? 아니면 회피하는 건가요?"


과거엔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았다. 하지만 니체의 언명처럼 신은 죽었다. 의미를 찾을 곳을 잃어버린 인간은 삶을 의탁할 새로운 신이 필요했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기로 결심한다.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지금 서 있는 곳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성을 과신한 나머지, 아니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은 나머지, 반복되는 실패에도 천국 건설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실패의 자가 증식이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만다. 지옥은 환경이 아닌 나 자신의 상실이다.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렸기에 완벽한 이념, 사상, 물질에 집착한다.


파우스트와 지식의 탑 위에 올라선 메피스토


『파우스트 엔딩』은 이 과정을 아름답도록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커튼콜 직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살기 위해 의미를 붙잡았으나, 붙잡느라 움켜쥔 것은 무얼까?' 그러나 의미는 붙잡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의미는 손끝을 비추는 빛과 같아서 잡힐 것 같지만 절대 잡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빛을 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빛이 전하는 온기를 느끼기만 하면 된다. 삶의 의미는 언제나 우리의 손길이 닿는 곳에, 우리의 눈길이 가는 곳에, 우리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의 뇌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려먹었는지 의미를 붙잡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이것이 파우스트의 길을 걷는 것임을 알지만, 도무지 그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자연스레 느끼지만,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자연스레 느끼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니. 그래서 이런 성정을 보면 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럽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희망은 있다. 극에서 신은 인류의 종말을 보고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신은 극의 종막에서 다시 한번 말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언어의 이분법적 특성이 '방황'이란 단어를 부각하지만, 실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노력'이다. 우리는 방황하는 존재가 아닌 노력하는 존재이다. 삶 속에는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지만, 길을 걷다 마주치는 꽃잎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생각 없이 올려다본 달에서 위대함을 발견하고,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사람에게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게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신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매 순간 의미를 느끼려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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