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달아날 판에 머릿속이 온통 공길이뿐이라니. 이놈 눈깔이가 멀쩡했더라면, 내 이십여 년 인생 가장 휘둥그런 눈을 볼 수 있었을게요. 어쩌다 목이 잘리게 됐냐고? 처음엔 나도 염병 나라 개판 똥판 친 임금놈 때문인지, 아니면 공길이를 살리고자 한 건지 헷갈렸소이다. 허나 지금 와서 보니 거 나자빠질 판국에 공길이 이름 두 글자만 아른거리는 게 아니겠소? 아무래도 저 무지렁이 놈 때문인 것 같소만...
아 원망하지 않느냐고? 허허, 지금 내가 원망하는 걸로 보이오? 그저 저놈 하나 어떻게든 살려야겠단 생각뿐이요. 차라리 저 빌어먹을 왕놈이나 골탕 흠씬 먹여주고 싶네만 하...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인가 보오. 응? 공길이랑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자 이제부터 말해줄 테니 거 귓구녕 열고 잘 들어보시오.
때는 내 나이 열둘 쯤이었지. 거 내 살던 동네 고아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바로 공길이었소. 세 살 터울이니 아홉 살이었지 아마? 애미애비도 없이 길거리 나앉아 풀이나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이... 쯧쯧 울 엄니 보기 안쓰러웠는지 집에 데리고 와 밥 좀 먹였소. 나도 밭 몇 떼기 가진 농민 자식이라 끼니를 제때 들지 못해 비실거렸지만, 이놈은 그 꼬락서니가 아주 말도 아니었지. 뼈가 제대로 여물지 못해 당최 이게 사내인지 계집인지 분간도 어려웠다오.
비록 우리도 없는 살림이지만, 그놈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어쩌다 식솔처럼 지내게 됐소. 사실은 말이오. 내 형제들이 죄다 역병으로 뒈져나간지라, 공길이와 있는 시간이 그리도 신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래서 내가 조르기도 했다오, 거 어린 나이 집안 살림이 중요했겠소? 친구가 중요했지! 하하하.
헌데 어느 날 현감인지 곶감인지 하는 나으리가 우리더러 세금으로 소고기를 요구하는 게요. 소새끼는커녕 개새끼도 없는 집구석에 소고기는 뭔 놈의 소고기!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소고기가 소가 되고, 아니 그러다 한 달이 또 지나니 소가 둘이 되는 게 아니겠소. 고리가 고리를 물어 거 씨부랄 있지도 않은 소가 지들끼리 번식을 오질 나게 했나 보오. 그다음은 말도 마소. 소새끼들에 고리를 더하니 사람이 되더이다. 우리 어머니는 끌려간 후 콧 베기도 안 보이고, 아버지는 장 맞으러 갔다가 장 치렀수다.
거 참 웃기지 않소? 나야 그때부터 고아가 됐지만 공길이는 원래 고아인데 또 고아가 되어부렀네! 어허, 그딴 건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고아? 고아아? 옜다 이놈아 부랄 고아다! 하하하. 아무튼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밖에 없으니 내 그때부터 각별한 애정이 생긴 것 같구려. 원체 계집 같아 이상허이 챙겨주고 싶더라고. 계집 같은 사내인지 사내 같은 계집인지 내 여태 분간도 안 갈 정도니까. 그런데 그렇게 떠돌이 생활 중 동네 저잣거리에 놀이패가 온다는 거요. 우리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한바탕 노는 꼴 구경이나 할까 하고 갔지.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오. 신명 나게 놀고 자빠졌을 뿐인데, 아니 엽전이 생기는 거 아니겠소. 대관절 세상 거 누가 논다고 돈을 주오? 그리하야 공길이랑 놀이패를 졸졸 쫓아다니며 어깨너머 따라 하기 시작했지. 웬 거지냐며 두들겨 처맞기도 하고, 주먹밥 하나 몰래 훔쳐먹다가 잡혀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오. 명월 누님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 살 파먹은 구더기가 18대를 이었을 거요. 누님의 따스한 마음씨 덕에 놀이패에서 우릴 받아들이기로 했던 날은... 키야 정말이지 거 밭에서 소고기가 나는 심정이었다니까!
나와 공길이는 그렇게 우인이 되어 어느덧 패거리 안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소. 잘 놀면 잘 놀수록 배때기가 두둑해지더이다. 그렇게 조선 팔도 신명 나게 뒤집어엎고 다니다가 어느 날 한양에서 한 판 놀 때였소. 아니 그런데... 거기 구경하던 사람 중에 용놈이 있을 줄 내 어찌 알았겠소? 내 거 알았으면 면전에 캬앜, 십 년 묵은 여의주를 퉤 하고 뱉었을 텐데 말이오. 어쨌든 우리 노는 꼴이 임금 눈에 들어찼는지 궁으로 들라는 어명을 받았소. 그때부터 공길이와 나는 임금 앞에서 광대 짓으로 연명하고 살았지.
가까이서 보니 이놈의 임금은 하는 짓이 아주 천한 망나니만도 못한 게요. 백성들은 끼니가 없어 그 시체가 산과 강을 이루는데, 자신은 영달과 여색에만 빠져 사는 게 아니겠소. 염병할 가진 것도 많은 놈이 뭘 더 가지겠다고 그리도 영달을 꾀하는지, 기가 차고 똥이 찰 노릇이오. 궁궐 밖 백성들은 못 먹어 거시기가 비실거리는데, 이 왕 놈은 뭘 그리 처먹었는지 거시기 하난 왕 답더이다. 아주 이년 저년, 이게 왕궁인지 자궁인지 원 알 도리가 있나. 왕 마누라는 뭐 다른 줄 아쇼? 권력 하나 얻겠다고 아주 아랫도리를 사방으로 펄럭이더이다!
하지만 어쩌겠소? 조선의 임금이란 작자에게 내가 뭘 할 수 있느냔 말이오? 어차피 인생 한바탕 오지게 놀고 가면 끝인 거 우인답게 신명을 떨었지. 아니 근데 이놈의 임금은 또 뭘 그리 좋은 걸 쳐 잡수셨는지 여색으로는 부족한 거 같았소. 우리 하나밖에 없는 공길이에게 슬슬 연정을 품더니 침소로 불러대는 게 아니오! 공길이야 아무 일도 없었다지만 왕 거시기가 언제까지 가만히 있겠소? 바보 같은 공길이 이 자식은 그동안의 삶에 한이 맺혔는지, 그렇게라도 벼슬아치에 오르겠다 하더이다. 아주 미치고 환장하여 재주를 세 바퀴 반을 돌 노릇이지 뭐요.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나자...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