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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무 May 12. 2020

2020년 5월 8일의 편지

엄마 오늘은 이렇게 하자

엄마 5월 8일이야. 잘 알고 있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잖아. 아빠랑 결혼한 날.

어쩌다 옛날 사진첩에서 결혼사진을 볼 때면 드레스가 맘에 안 들었어.라고 말하면서도 웃던 그날이잖아.

어버이날에 결혼했으니 효도한 거다.라며 농담처럼 말하던 날이잖아.

나는 어버이날은 챙겨줄 수 있는데 결혼기념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네.

그래서 나는 어버이날만큼은 엄마 생일보다 더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어 고민하고 그래. 엄마 몰랐지?

사실 아빠의 목소리. 아빠의 손. 그런 걸 느끼고 싶을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거야. 그런 거뿐이야.


엄마는 아빠가 있기 전과 후로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아빠가 있을 때만 해도 술은 입에도 안 대고, 모임이라곤 없었고, 인간관계도 좁았잖아.

아빠가 떠난 후의 엄마는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고, 모임도 한두 개가 아니고,

아는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 거야. 다그치려는 건 아니야.


엄마가 그랬잖아.

나는 집에만 앉아서 너네 언제 오나 기다리는 엄마는 되기 싫어.

너네 말고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은 되지 않을 거야.

그 말대로 엄마의 약속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세상은 더 넓어져.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더 젊어져.

엄마가 옳았어.


엄마랑 나는 아빠를 추억하는 방식이 다른 거 같아.

엄마가 아빠 얘기를 꺼낼 때마다 반응 없는 내가 서운하진 않아?

엄마는 아빠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과 아빠 이야기를 하면서 순간의 슬픔을 털어내곤 하잖아.

나는 아빠가 화장로에 들어가 재가 된 그날부터 아빠도 내 마음에 묻었어. 아빠를 떠올리면 서글퍼지거든.

아빠 사진을 보면서도 나는 낯설어. 사진 속 남자가 아빠인지 모르겠어. 그럼 그런 내가 미워져.

그래서 나는 아빠를 모른척하기로 했어. 그러니 엄마가 조금만 이해해주라.

근데 나도 종종 아빠를 생각하다 울어. 최근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다가 한석규를 보고 엉엉 울었어.

아빠랑 너무 닮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얼굴이 맞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때부터 그 영화의 결말은 영원히 모르기로 했어.


아빠 대신 내가 죽는 게 나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던 날. 엄마한테 바보 같은 질문을 했었어.

젊은 할머니가 있는 엄마의 20대와 나이 든 엄마와 내가 있는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로 가겠냐고. 엄마는 니랑 살란다.라고 말했잖아.

엄마가 그렇게 말한 그때. 이제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죄책감으로 가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아빠는 나 대신 간 게 아니라. 나를 남기고 간 거니까.


그냥 이렇게 하자.


엄마 오늘은 아빠를 위해 창문을 열어주자. 아빠가 이사 간 우리 집 찾아올 수 있도록.

엄마 오늘은 엄마 이름을 불러보자. 바꾼 엄마 이름 아빠가 잊지 않을 만큼.

엄마 오늘은 마음껏 아빠를 쏟아내자. 아빠가 우리 목소리 들을 수 있게.


엄마 결혼기념일 축하해. 그리고 오늘은 아빠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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