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쓰 May 07. 2020

친구에게

식상하지만 널 응원해

집 와이파이는 밤만 되면 일할 생각을 않는다.

아주 굉장히 짜증 나는 마음을 안고 오랜만에 접속.


4월 20일부터 출근했으니 이제 백수탈출 3주 차.

저 영롱하고 아름다운 타이틀을 왜 탈출했나 가열차게 후회 중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야심 차게 직장인 라이프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겠다 다짐했건만, 개뿔. 집에 오면 누워있기 바쁘다. 와식생활 일인자인 내 동생의 명언이 생각나는 밤.

'누울 수 있을 때 앉지 마라'


그럼에도 오늘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 하나 써보겠다고 앉았다. 다행히도 나에 관한 건 아니다. 내 뽕에 차서 살긴 하지만 아직 그 정돈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를. 오늘은 한 친구에게 하고픈 이야기다.


로스쿨에서 처음 만난 이 친구는 조금은 가냘픈 첫인상이었다. 말투가 조곤조곤해선지 말라선지, 어쩐지 조심스레 다가가야 할 것 같았다. 사법고시 2차 공부를 하다 망설이는 마음으로 로스쿨에 왔다고 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많이 친해지진 않았지만 어쩐지 마주칠 때마다 버거워 보였다. 나중에 알았다. 2차생들은 또 그들만의 리그에서 허덕인다는 사실을. 로스쿨에서 처음 법을 접하는 일명 '비법대생' 출신들보다 훨씬 나은 성적을 보여야 취직이 보장된다나. 남의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친구한테는 눈이 갔다. 누가 봐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 속 한 번 안 썩이고 살아왔을 것 같은, 항상 자기 자리에서 죽을 둥 살 둥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친구는 그래 보였다.


우리가 가까워진 건 내 동기들이 다 졸업하고 난 변시 준비를 하게 된 해부터. 그냥 생각나서 해 본 연락에 이 친구는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달려왔다. 나중에 듣기로는 친하지도 않은데 연락해서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 부리나케 왔다고.

어쨌든 우린 점점 친해졌다.


친구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게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재학 중에 빅펌에 컨펌이 되었고, 나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게도 변시에 한 번 떨어지고 법 공부 5년 만에 변호사 배지를 달았다. 변시 합격 명단이 뜨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캡처해서 카톡 해 준 것도 이 친구.


서로 회사가 5분 거리라 자주 볼 수 있겠다고 좋아한 게 무색하게도 어제 점심때나 겨우 겨우 볼 수 있었다. 약속시간을 한 시간 미뤄 겨우 볼 수 있었던 친구 얼굴. 흙빛이었다. 요즘 일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던 친구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할 말을 잃었다.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네 상황은 너만의 것. 내가 어떻게 감히 이해하는 것 마냥 입을 대겠냐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힘든 생활을 계속 뭐 때문에 이어가야 하니 싶어서 당장 그만두라고 주제넘게 얘기하고도 싶고. 어쨌든 누군가는 탓하고 싶고. 그게 너일지 너희 회사일지 이 시스템일지 몰라서 나는 네 앞에서 실없는 소리나 해대기로 했다.


처음으로 맡은 소송 때문에 물을 듬뿍 먹인 솜 같이 되어서는 집에 와서 뜨거운 물로 한참 동안 목욕을 하면서, 네 생각이 났다. 웃기지? 변호사 흉내 낸 지 이제 3주 찬데 그거 조금 힘들다고 네 고단함을 엿 본거 같다고 생각하는 게. 브런치에 왜 빨리 새 글 안 올리냐고 하던 네 생각에 이 밤에 이렇게 오그라드는 글을 올려본다. 오늘도 새벽 네 시 퇴근각이라는 네 카톡에 좀 울컥했다면 넌 뭐랄까.


친구야. 너무나도 식상한 말이지만 항상 널 응원한다. 어제 점심 먹으면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나한테 합격 축하한다고 하면서 너는 뭐라고 했더라.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자유롭게 살라고 했지. 너도 같아. 우린 젊고 자유롭다. 행복할 자격이 있어. 잊지 말자. 많이 아낀다. 힘내자.

매거진의 이전글 만남의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