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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Nov 05. 2019

내 인생을 아세요?

나와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법

  어렸을 때도 지금도 언제나 노선도 기준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살다 보니 다소 긴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러 나가기 전에 꼭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이어폰과 책. 뭔가를 듣거나 읽기에는 규칙적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지하철 안은 나쁘지 않다. 긴 승차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여기에 최근에는 스마트폰도 자주 들여다보니 만약 책이 없다면 그 대신 보면 된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이것들 중 이어폰이 나에게 의미가 좀 달라졌다. 중요도가 너무 커졌다. 없을 때는 불안해지는 지경이다. 요새는 또 무선 이어폰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잘 들고 나왔어도 충전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랬던 언제는 심지어 지하철 역 안 편의점에서 줄로 된 이어폰을 새로 구매한 적도 있다. 열 시간도 아니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렇게 이어폰에 다소 집착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소리 때문이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을 다른 소리로 덮기 위해서다. 요새 이상하게 내가 운이 없었던 것인지 지하철을 타기만 하면 듣고 있기 힘든 소리들을 자주 듣는다. 단순한 생활소음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화 소리나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 같은 것들은 좀 커도 충분히 들을 만하다. 아이들이 옹알거리거나 우는 소리도 괜찮다. 문제는 불특정 한, 때로는 누군가를 염두에 둔 것만 같이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소리이다.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 비난하는 소리이다.

  그중에서도 특정 종교를 믿을 것을 목 놓아 울부짖는 것 정도야 아주 고전적이라 나도 익숙해져서 충분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대부분 칸과 칸을 재빠르게 이동하면서 소리를 지르시니 참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자신이 믿고 있는 특정 가치관을 아주 길게 설파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단순히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거나 아니면 통화를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그 소리가 너무 크다. 이 정도 소리면 지금 이 지하철의 같은 칸에 같이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더러 들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또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유튜브 동영상 소리가 있다. 대통령이나 특정 인물 혹은 특정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소리들은 그 수준과 논리성을 떠나 내가 지하철에서 억지로 들을 필요는 없는 소리임이 분명하다. 이어폰을 안 가지고 와서 저러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도 혼자 보면서 듣기에는 지나치게 큰 소리가 지하철 안을 울리면 나는 조용히 챙겨 온 이어폰을 귀에 꽂거나 이미 꽂고 있었다면 볼륨을 올린다. 


  그런데 이주 전쯤이었던가. 나는 지하철 안에서 그만 그러한 소리들의 끝판 왕을 만나고 말았다. 그날 나의 무선 이어폰은 하필이면 충전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그 소리를 30분 넘게 듣다가 처음으로 화를 낼 뻔했다. 같이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내리기 전까지 꾹 참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분명 당장에 누군가와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므로.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의 나이를 알고 있다. 70살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내가 70살인데, 여기는 이제 한 74살부터 앉아야 해.”

  그 여성분은 어떤 남성분과 서로 자리를 양보하는 중인 것 같았는데 모습은 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앉아 있던 자리는 노약자 석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요? 이런 거 다 이명박 때 만든 건데. 사람들이 그런 건 아무도 얘기를 안 해. 문재인이 얘기만 하지.”

  지하철 노약자 석이 그랬던가, 나도 모르게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이어서 또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목소리에 점점 더 날이 섰는데 아까 자리를 양보했던 분이 약간 말리는 듯한 반응을 하자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그쪽이에요? 혹시 전라도인가.”

  그리고 뒤이어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니 전라도 것들은 그럴 거면 지들끼리 살던가.”

  전라도 출신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이지만 여기까지도 그냥 들을 수 있었다. 그냥 저렇게 생각하시는 어르신인가 보다 싶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니까. 

  그런데 이후 그 소리는 점점 이상한 쪽으로 뻗어 나갔다.

  “내가 글은 몰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잘 알지. 그러면 안 되는 거여요. 그러면.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화가 나기 시작했던 게.

  “요새 젊은것들이 아주 못돼 처먹어가지고.”

  그래도 여기까지도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배때지가 불러 터져서 그래. 그러니까 애새끼들이 아주 싸가지들이 없어. 싸가지들이. 살기가 편하니까 아    주.”

  그렇게 갑자기 뜻밖의 악다구니 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리자 어느 순간 나는 그만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그 앞으로 걸어가 이렇게 되물을 뻔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이 아세요? 우리 인생을 당신이 알아요?”


  무선 이어폰만 잘 충전했다면, 아니면 그런 일을 대비하여 줄로 된 이어폰을 따로 넣어 왔다면, 아니면 그냥 어디서 또 새로 사서라도 들고 탔다면 없었을 그때 그 감정의 동요는 이상하게도 며칠을 갔다. 사실 딱 나한테 한 말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잘 아신다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예의는 전혀 모르시는 듯한 그분에게 애꿎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렇지만 그런 일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는 지하철 안이니 아예 생길 수 없는 일은 아닌데. 운이 없었다고 치고 빨리 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이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이미 또 다른 일들로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 이전에 어떤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함께 듣던 분이 강연이 계속 진행이 안 될 정도로 강연자에게 중간중간 계속 어떤 문제 제기를 했던 일이 있었다. 또 오랜 시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던 유명인이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 반말조로 화를 표현한 일이 있었다. 모두 나에게 그런 것도 아니었으며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을 목격하자 당황하다 못해 심지어 그들에게 실망했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그게 또 이상했다. 나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분명 그 강연에서 강연자의 발언은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만했다. 또 공공연하게 글로 화를 낸 그 유명인은 인신공격에 가까운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을 또 한참 머릿속에 넣어 놓고 다니다 보니 문득 이것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나라면 일단 초대된 강연자가 강연을 하는 중이니 문제 제기할 것들은 기억을 해 두거나 메모를 해 둔 후 다 듣고 나서 이야기를 했을 텐데. 또 불쾌하고 화가 나는 일을 모두가 다 볼 수 있는 곳에 표현하고 싶으면 반말이나 공격적인 말들보다는 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표현들로 골라 말했을 텐데. 그러니 결국 나도 그 사람이 나와 다르다고 어떤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나의 방법이 꼭 옳다고 할 수도 없는데. 또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다 알지도 못 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중이었는데 심지어 갑자기 나랑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만 같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나니 이제는 화까지 나 버린 것이다. 그냥 나랑은 아예 다르네 하고 넘길 수도 있는데.

  나와는 다른 생각과 다른 말, 다른 행동에 대해 느껴지는 불편함은 결국 내가 무엇이든, 누구든 다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오는 것 같다. 때로는 내가 그 비슷한 것을 먼저 겪었다고, 혹은 더한 일도 겪었다고, 그래서 내가 잘 안다는 그런 섣부른 생각들 말이다. 아무리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도, 내가 오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사람이라도,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도 나는 그 사람의 그동안을 다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무수한 경험들을 다 알 수가 없다. 그런 모든 것들이 쌓여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되는 것이니 모두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나랑 꼭 같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얼마나 편협한 태도인가.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것들에 대해 그토록 분노했던 그분에게 나 역시도 하마터면 당신이 내 인생을 아느냐고 물을 뻔했다. 나도 그 사람의 인생을 전혀 모르면서. 그러니 그 상황을 더 견디기 힘들어서 그분에게 뭔가 이야기를 해야 했다면 그냥 너무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해 달라고 말을 했으면 되었다. 혼자 화만 내고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비인간적이거나 잔혹한 범죄인 경우들은 제외하고, 또 상대가 그 다름에 대해 뭔가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요구하는 경우들도 제외하고, 일단 다름부터 인정해 보려고 한다. 그 다름에 무턱대고 마음을 오래 쓴다는 것 자체가 나 혼자 불안하다는 증거니까. 또 상대를 나와 똑같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일 수 있으니까.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각자 다른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런 다름에 대한 인정이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지치지 않고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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