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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Dec 31. 2019

다시 생각이 잘 안 난다면

2019년을 보내며

  이상하죠. 저는 그날 이후 지나간 날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게 잘 안 돼요.

  그래서 하루하루 그때그때를 기록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그 순간들에는 무엇을 느끼는 것 같은데, 그 느낌을 한참 있다 다시 떠올려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혹시나 싶어 유군에게도 물어봤는데 유군도 그렇대요.

  “올해 뭐가 제일 좋았어?”

  “올해 뭐가 제일 속상했어?”

  “올해 누가 제일 미웠어?”

  물었더니 기억이 잘 안 난대요.

  사실 우리는 올해 여름 집을 사서 이사도 했거든요. 심지어 유군은 하반기에 새 책도 냈는데. 그걸 다시 기억해 내려고 하면 한참이 걸린다는 거죠. 예전에는 분명 안 그랬는데.

  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필름처럼 지나간다, 그런 말들이 있잖아요. 저도 유군도 이제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그게, 아무래도 그날이 기점인 것 같아요. 그날 이후는 그러니까, 그냥 모든 날이 한 덩어리예요. 뭉뚱그려서 떠올릴 수밖에는 없는 거죠. 한 때는 견딘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견딘다는 느낌마저도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사실 그렇거든요. 셋이었던 그때는 둘 다 꽤 선명하게 떠올려 볼 수 있거든요. 이렇게 더 이전은 생각이 다 나면서 최근은 생각이 잘 안 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요, 아마도 이것인 것 같아요. 그게 그러니까, 너무나 큰 감정을 느껴 버리고 말아서인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크고 강렬해서 모든 것들을 다 뒤덮어 버리고 있는 것 같아요. 유군은 그것이 대체적으로 슬픔과 우울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저는 왠지 그것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억울함도 좀 섞여 있는 것 같고 앞으로에 대한 막막함도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그것들을 늘 의식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거대한 감정의 지배하에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 이후의 시간들이 흘러가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고 하나의 덩어리 정도로 생각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어떤 막 같은 것에 싸여 있는.

  그래도요. 저는 그래요. 분명 그 사이 달라진 점은 있어요. 처음에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좀 이상했거든요.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그래도 그냥 살았는데, 이제는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게 조금 대견하게 느껴져요. 또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면서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니 올해 좋았던 것, 혹은 행복했던 것, 하물며 뭘 하고 살았는지조차 기억이 잘 안 나면 좀 어떻겠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를 쓰면서 그럼에도 이렇게 여전히 살고 있는데.

  내년에도 그래서 그동안 그래 왔듯이 그냥 주어진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 볼까 해요. 이미 지나가 버린 날들, 또 미리는 절대 알 수 없는 앞으로의 날들은 되도록 의식하지 않으면서요. 그게 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어쩌겠어요. 결국 무엇인가를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인 것을요.

제일 맛있었던 건 그래도 기억나요. 위 사진의 바다를 보며 먹었던, 저 하얀 접시에 있는 회국수. 최고였어요. (제주도 촌촌해녀촌)



매일의 이야기는 @some_dais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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