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한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나는 특히나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더더욱 상대에게 무엇을 묻는 게 어려워졌다. 아주 어렸을 때는 누구든 만나면 해맑게 이것저것 잘도 물어봤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러면 곧 마음 한쪽이 불편해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어느 순간 어떤 사람을 학교나 직업, 나이, 가족 관계 등으로는 거의 알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많은 경우 곧바로 이것저것 뭘 알려고 드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구든, 혹시 그래야만 한다면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알아 가면 되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태도를 가지고서는 풀어 나가기 어려운 상황들이 생긴다. 예를 들면 생전 처음 뵌 분을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 한다거나, 어떤 행사에서 다른 분에게 질문해야 하는 등.
그래도 만나서 안녕하세요, 한 후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을 누른 채 질문하는 것은 그나마 나았다. 이후에 지면으로 옮기기 위해 대화를 글로 정리하는 또 한 번의 시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말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끝나는 행사에서는 어떤 질문을 해야 좋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특히 그 상대가 너무나 큰 아픔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날의 행사는 강연자로 초대된 분이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시면 이후 청중들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 질문 시간 동안의 진행을 내가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질문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예비 질문들을 몇 가지 준비하기로 했는데 과연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질문도 받게 되신 분은하나밖에 없던 아들을 잃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머니였다. 이후 그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활동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니 그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터가 사실은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지, 또 그 일 이후 어머니의 삶은 어떻게 변했고 앞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등은 앞선 말씀 속에서 거의 다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무엇을 더 질문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 당장에 뭔가를 해야 하는 경우, 나는 더욱더 솔직해져 본다. 그러면 그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나 자신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므로. 이번에도 여러 가지 걱정들은 일단 뒤로 미루고 내 입장에서 솔직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러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 활동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은 무엇인가요? (안타까웠던 상황 등)
-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닌 함께 사는 사회가 되려면 개개인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 여러 활동으로 이겨내고 계시지만 문득 마음이 너무 힘드실 때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 사람들이 김용균 님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줬으면 하시는지요?
그런데 이렇게 막상 적어 두고 보니 과연 내가 이런 것들을 그분에게 궁금해해도 되는 것일까 싶었다. 그래서 힘들게 고민해서 준비해 놓고도 결국 나는 제발 이 질문들을 하게 될 상황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실제로 행사를 진행해 보니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었고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예상대로 첫 질문 또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준비한 예비 질문 1번을 여쭤 보았다. 그나마 그것이 앞서 직접 하신 얘기와도 연관이 되어서 마음의 부담이 덜 했다. 다행히 뒤이어서 몇 분들도 최대한, 아주 조심스럽게 어머님께 질문을 해 주셨다. 그렇지만 굳은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는데 그 상황에서 또 어떤 분이 손을 드셨다.
일단 그분은 본인 역시도 비슷한 나이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그런데 이어진 본격적인 질문이 바로 이러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들을 키우시면서 좋았던 순간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혹시 그 얘기들도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아들을 잃고 아직 한참 아픔을 이겨내고 계신 분에게 과연 이런 것을 궁금해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대답하기 너무 힘드실 것 같아바로 어머님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이어진 어머님의 표정과 대답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저 여기서 우리 아들 자랑 좀 해도 돼요?”
그러니까 어머님 말씀은 이러했다. 일단 아드님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사교육도 많이 받지 못 했지만 대학교 진학부터 취업까지 스스로 모두 잘 해 내었다. 그만큼 성실하게 생활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 동료들 등 다른 사람을 먼저 돌볼 줄 알았다. 그리고 어머님과는 달리(이 부분에서는 입가에 살짝 미소까지 지으시며) 글씨도 예쁘게 잘 썼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만들어진 재단의 이름도 아드님의 글씨를 가져다 썼다고 했다.
그런 어머님의 얘기를 쭉 듣고 있자니 어느새 내 머릿속에 있던,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불쌍하고 안타까운 한 청년이 너무나 잘 자란 24살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분을 실제로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다른 분들의 표정도 살폈는데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계속 흐뭇하다는 생각만 할 수는 없었다. 이어진 이런 어머니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또 한 번 미어지게 만들었다.
“만약에 제가 형편이 좀 나아서 우리 아들 4년제 대학 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이렇게 좋은 아이였는데…….”
이 날 이후 나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니까 관심이란 그것이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상대를 불편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상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깊게 살피는 것을 꺼려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이니 그 부분을 조심해야겠다, 거기에 너무 다가서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들에 대한 커다란 그리움도, 추억들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이런 생각이 드니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떠서 문 밖으로 조금만 나서도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는데. 또 실제로는 마주치지 않더라도 텔레비전, 라디오, PC, 스마트폰 등 각종 수신 장치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데. 그러니 어떤 인생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알게 되는 때도 있다.
거기에다 나는 이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서인지 들을 일도 볼 일도 자꾸 더 많아진다. 그러니 그런 나의 표현들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좀 더 용감해져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함께 사는 다른 이의 인생에 좀 더 용기 있게 다가서야 할 것 같다. 물론 사소한 관심이라도 그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쾌한 간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나의 작은 관심과 공감, 위로가 어디에서는 큰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나 역시도 그렇게 받고 그렇게 바뀐 힘들로 버티고 살아냈던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