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꽤 공부를 잘했다.
전학을 오기 전 한 학년에 10반이 넘는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기도 했고, 전학을 갈 당시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엄마에게 가지 않으면 안되겠냐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전학을 오고 나서도 늘 상위권에 머물렀고, 학부모 간담회때 우리 엄마는 담임 선생님들의 궁금증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애를 어쩜 이렇게 야무지게 키우셨어요? 하는 물음을 받은 엄마는 그저 빙그레 미소지었다.
뭐, 지금 내 처지를 보고 있자면 한낱 아득한 추억거리 뿐이지만 당시 내겐 그러한 칭찬이 은근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잘 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더 멀리 나아가고, 더 많은 것을 배우며 한층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다.
시골마을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버스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고되긴 해도 아주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아예 '시'가 다른 대학으로의 진학은 조금 낯설긴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고, 휴학을 하고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것은 지루하긴 해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엔 틀림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고팠던, 그리고 그리 되리라 믿었던 모든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비면제'를 조건으로 내세운 2차 인문계를 권하는 삶에 찌든 부모의 얼굴을 보고 울며 겨자먹기로 시내 인문계를 포기했다.
처음 학기 기숙사비를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말에 "정말로 안오실거예요?" 하는 대학의 전화를 받고도 울음을 삼키며 꿈을 포기했다.
다른 동기들처럼 비싼 돈주고 학원과 인간을 등록하는 대신,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휴학신청서를 작성했다.
얼마 산 것도 아닌 내 인생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넘쳤지만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두를 원망했고 스스로를 원망하는 긴 시간이 있었다.
후회가 가득했고 미련이 흘러넘쳤고, 자꾸만 뒤돌아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포기하게 만드는 사람과 상황이 미치도록 싫었고 동시에 맞서보겠다는 용기 또한 없는 스스로도 싫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의지가 꺾이는 것이 반복되다보면 무언가를 그저 '꿈'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워진다.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지도 않을 것이라는 뒤틀린 다짐.
그러다보니 지나온 시간들이 켜켜히 쌓여 만들어낸 지독한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아픔을 수반했다.
여전히 지금도 그렇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힘겹고 욕심내는 것이 버겁다.
목표를 알 수 없는 꿈을 향해 원룸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다.
이미 놓쳐버린 시간에서 남들 다 하는 기본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현저히 실감이 나서 그냥 남들 다 가진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만큼 내 꿈은 목표가 없었다.
나흘만에 집 밖으로 나갔다. 일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의 반납기한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연장하고, 연장하면서 어떻게든 끌어보던 기한을 더 이상 연장할 수 없었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주저앉으면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아 벌러덩 누워버린 내겐 나를 잘 모르는 타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싫기만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책만 반납하고 오려다가 그만 덜컥 또 실수를 저질러렸다. SNS에서 이따금 눈에 보이는 좋은 글귀들을 저장해두었는데, 괜스레 그 날따라 그 글귀들의 원본을 읽고 싶었다. 마음이 지쳐 만들어낸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조용한 도서관의 종이 냄새를 흠뿍 맡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정적이 좋았고 간혹 사락거리며 들리는 책장넘기는 소리가 좋았다.
청구기호가 출력된 작은 종이를 들고 책들을 찾아다니다, 전혀 생각에 없었던 엉뚱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노르스름한, 신선한 달걀 노른자같은 책표지에 하얀 궁서체로 쓰인 제목이 전부인 반질반질한 책.
아흔일곱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제목만 딱 봐도, 어르신이 썼구나 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나온 인생의 이야기겠거니 하며 지나친 책이 이상하게 아른거렸다.
품에 안은 몇 권의 책을 들고 열람실에 앉아서 읽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 책이 생각나, 그냥 한 번 가져왔다. 보나마나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려주는 흔한 자기계발서 정도라고 치부한 책. 가장 마지막에 펼쳐 본 책의 첫 장은 1988년에 쓰인 할머니의 일기였다.
버들강아지가 봉실봉실 피어 있고 동백꽃도 몽오리를
바름바름 내밀며 밝은 햇살을 먼저 받으려고 재촉하네.
어여쁜 단어들로 아무런 기교없이 쓰인 담백한 일기 한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다음 장으로 넘길 생각도 않은 채, 그 한 구절을 반복해서 눈에 새겼다.
SNS으로 본 베스트셀러의 유명한 그 어떤 글귀보다 더 예뻤다. 참 예쁘게 느껴졌다.
결국 빌리고자 했던 책을 두고 망설임없이 그 책을 빌려왔다.
책은 인생의 경험을 나열한 글도 아니었고, 방향을 알려주는 글도 아니었다.
그저 소녀에서 아내로, 어머니로, 할머니가 되어가는 한 여인이 봉숭아꽃물을 들인 날을 기록하고 처마에 앉아 지는 노을을 구경하고 오랜만에 만난 손주를 자랑하는.
큼직한 글씨로 꾹꾹 눌러쓴 일기장이었다.
여전히 나는 일어나는 것이 두렵고 아프다.
지나온 날들이 후회되고, 한심한 스스로가 안타깝고 앞으로 걸어갈 미래가 뿌옇기만 하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 책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마음을 달래기도 하며 버텨간다.
유명하지도 않은 책 한 권에서
살아갈 방향을 알려주지도 않는 일기에서
우리는 그저 난생 처음 보는 따스한 한 자락에 마음이 풀어지는 경험을 겪으면서.
세상이 원망스럽고 미울때마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달래는 별 뜻 없는 자장가같은 풍경을 떠올릴 수 있는
산들바람 같은 책 한 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깨달으며 버티는 것이다.
오늘은 노인정에 가서 공굴리기를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그냥 있다가 손주가 와서 보러
내가 보러 이쪽 방에 왔다.
그래서 손주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사는 것 같다.
- 이옥남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