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마감기간이 임박해서야 급하게 채워보는 이력서에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그렇다할 번듯한 경력하나 없었다. 깜빡이기만 하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괜스레 마르는 목을 축이기 위해 물 한모금을 꿀떡 들이켰다. 슬며시 저무는 해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취를 감춰 푸른 어둠이 몰려든 작은 방에서 홀로 빛나는 하얀 화면이 그리도 야속할 줄 누가 알았을까.
꾸역꾸역 키보드 자판을 누르고 지우길 반복하다가, 그 와중에도 배는 또 고파서 온종일 물 밖에 먹지 못한 축축한 몸에 빵 한 조각을 밀어 넣었다.
늘 그렇듯, '기회를 줘야 뭐라도 쓰지'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어진 선에서 출발도 하지 못한 내 자신이 싫기도 했다.
가끔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너 정도면 잘 할텐데. 그 끝에 붙은 어색한 공기가 미처 숨기지 못한 의문을 실어 다가오는 날이면 썩어 들어가는 조급함을 멀끔히 숨긴 덤덤한 얼굴로 답한다. 글쎄요.
글쎄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
견뎌온 모든 시간이 부정당하는 말인 것만 같은 짧은 세 글자를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통해 내뱉고 나면 살점이 떨어져나가 휑하기만 한 마음이 전부라.
내 작은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더 작은 냉장고에는 이렇다 할 반찬 하나 없다. 양배추 반 조각과 한참이나 전에 받은 김치 한 통. 주먹만한 사과 서너개가 전부인 냉장고에서 꾸준히 뒤져 찾아낸 하루 삼 시 세끼가 꼭 내 모습인 것만 같아 서러울 때가 있다.
글쎄요. 그래도 잘 살아갑니다.
글쎄요. 그래도 열심히 준비합니다.
글쎄요. 그래도 저는...
지금 당장을 견디는 것만도 벅찬 와중에 뭐라도 해보려 오늘도 아침일찍 일어납니다. 묻기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아무것도 배운적 없어도 혼자라도 기웃대봅니다. 자꾸만 사라지는 통장잔고에 한숨을 쉬면서도, 다가올 내일이 두려운데도 물을 마시고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합니다. 지친 하루의 끝자락에서 머리 맡에 놓인 시집 한 귀퉁이에 책갈피를 꽂았습니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어색한 공기처럼
"글쎄요." 세 글자 뒤 꽁꽁 숨긴 내 쓸쓸한 애처로움이 닿았으면 좋겠다.
고고히 버텨가는 내 마음이 더 이상 아픈 웃음을 짓지 않도록.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해바라기의 비명 '함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