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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덕 Aug 03. 2024

기린 같은 아빠 vs 말 같은 아빠

나의 최애 영화감독 중 한 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에서 엄마와 초등학생 아들이 돌아가신 아빠가 만약 동물로 환생한다면 어떤 동물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은 기린을, 엄마는 말을 선택한다.


영화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짐작건대 기린 같은 아빠는 그리움과 추억, 희망의 상징이다. 기린은 저 멀리 바다 건너서, 동물원에서, 상상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다. 기린을 통해 아빠는 늘 곁에 있지 않지만, 언제나 마음속에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기린의 높은 목은 아이가 멀리 내다볼 수 있게 해주며, 세상을 더 넓게, 더 높게 바라보게 한다.

두 살 배기 아이도 기린을 좋아한다. 동물책이나 보드에 있는 기린 그림을 가리키며 "이인(기린)!"이라고 하거나, 자석 블록을 쌓아 목을 길게 만들면서 "이인!" 하며 기뻐한다. 가끔 밤톨이가 웃으면서 잠꼬대를 할 때, 너른 초원에서 아까 만든 블록기린의 머리 위에 올라 구름을 뚫고 그 위를 관찰하다 긴 목을 미끄럼 타고 내려오는 꿈을 꿀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말 같은 아빠는 현실에서의 보호자 또는 실용적인 도구이다. 말은 실제로 탈 수 있으며, 든든하고 어디든 데려다 줄 수 있다. 실질작이고 경제적인 힘이 되어주며,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아빠다.


경쟁사회가 요구하는 아빠는 말 같은 아빠다. 나 역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아마도 내 인생의 최종 종착지가 말 같은 가장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밤톨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흐르며, 나를 위해서라도 단순히 책임감 있는 아빠가 아니라 좋은 추억과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함께 산책을 하든 비오는 날 물장구를 치든 사소한 순간들 거의 대부분은 잊혀지겠지만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운 좋게 살아남아 추억이 되고, 어느 한 시절의 아빠를 대표할 수 있는 챕터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본다.


결국 나에게 주어진 남은 인생의 챕터들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의 모든 귀결점은 기린과 말 사이의 균형일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라는 존재를 느끼고, 그리워하고, 닿아있고 싶다. 그 중 우연히 기록될 그 챕터들이, 점차 쌓이고 추억될 그 시절들의 나의 모습이, 아이에게만큼은 기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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