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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Nov 17. 2022

능력보단 인연

나의 커리어가 말해주는 것

  2010년대 후반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2017년엔 '자존감'을 키워드로 한 단행본만 50종 이상이 발간되었단다. 그땐 그 많던 자존감이 다 어딜 갔는지 너도 나도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기였다. 자존감이라는 몹쓸 놈은 참으로 연약해서 작은 실패와 조그만 눈치에도 하릴없이 쪼그라들기 마련인데, 특히나 수없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내야 하는 20대에 가장 잃기 쉬운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숱한 순간들을 바닥 친 자존감의 늪에서 허우적대게 되는 직업 중 하나가 바로 '방송작가'다. 이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의 고용방식이나 기간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문제다.


  방송작가의 소속은 방송국이 아닌 프로그램 단위이다. 주로 메인작가가 구인공고를 내고, 이력서를 받고, 면접을 봐서 합격하는 작가와 함께 일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매주 혹은 매일 방송이 나가는 레귤러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종영이 되지 않는 이상 원한다면 오랫동안 일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시즌제 혹은 단발성 프로그램이 많아진 요즘 짧게는 3, 4개월 만에도 종영 후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운 좋게 선배 작가나 함께 일하던 피디가 다른 프로그램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시 취업시장에 나와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투고(?)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력서를 보낸 뒤 연락이 올까 말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야 성별불문, 나이불문이겠지만 수신확인에 '읽음'이 뜨고도 온종일 조용한 핸드폰을 바라볼 때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는 폭은 아무래도 연차가 낮은 작가일수록 더 심하다. (내가 그랬기 때문.)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이력서 사진이 이상한가?, 지원자가 너무 많았나?, 내가 너무 별론가?로 이어지는 자존감 하락은 결국 내가 과연 작가의 자질이 있는 것일까? 까지 도달하고 만다. 이력서를 보고 연락이 없는 것도 슬프지만, 면접을 본 후에 떨어지는 것 또한 꽤나 큰 상처가 된다. 말을 잘못했나? 혹시 실수를 했던가? 얼굴이 별론가? 소심해 보였나?? 난 이제 뭘 먹고살지???


  최근 3년 간 작가진이 적지 않은 프로그램에서 오래 일하게 되면서 후배 작가들을 뽑아야 하는 일을 2, 3개월에 한 번씩은 꼭 겪게 되었다. 늘 비슷한 조건과 내용을 담은 공고를 올렸는데도 어느 때는 이력서가 너무 많이 들어와 검토하기도 버거울 정도였다면 어느 때는 딱 한 통만 이력서가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이력서가 많을 땐 수많은 괜찮은 작가들 중 한 명을 고르느라 힘들었고, 이력서가 딱 한 통만 들어온 때엔 그 작가가 별로면 어떡하지?라는 근심 걱정이 많았다. 두 경우 모두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이력서가 많이 들어왔을 때가 조금 더 난감했다. 다다익선이라고 웬만큼 마음에 드는 이력서는 모두 뽑아 면접을 봤는데, 만난 작가들이 어지간히 다 괜찮은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땐 한참의 토의 끝에 눈물을 머금고 다른 좋은 작가들을 모두 보내주어야 했는데, 천성이 뭐든 쉽게 지나치질 못하고 오지랖이 넓어 면접 말미에 꼭 한마디를 덧붙이곤 했다. "만약 면접에 떨어진다면 작가님이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우리 팀이랑 인연이 닿지 않은 거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작가님도 매우 훌륭하십니다(?)"


  하필 내가 구직을 하는 시기에 하필 어떤 프로그램에 공석이 생겨 구인 공고가 나오고, 하필 그 프로그램의 이력서와 면접을 담당한 작가가 마음에 꽂히는 어떤 지점을 내가 갖고 있어야만 합류가 성사된다. 그때 내 경쟁 상대는 나보다 훨씬 나은 경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조금 부족한 경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면접을 보는 사람과 케미가 잘 맞을 수도 있고, 철천지원수나 전남친(?)을 닮아 첫인상부터 안 좋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아주 수많은 우연이 겹쳐져야 '함께'라는 필연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서류나 면접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내 부족이 아니고, 내 잘못이 아닌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숱한 후배 작가의 면접을 보게 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업계에서 일한 지 만 8년이 다 된 지금까지 숱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왔고, 숱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왔다. 다행스럽게도 그간 일해온 많은 동료들과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낸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많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 팀에서 함께 일하게 된 작은 필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보낼,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보내게 될 예비 작가들 그리고 동료 작가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이 모든 건 그 프로그램과 그 팀원들, 그리고 나의 인연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절대 당신이 부족해서, 당신의 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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