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전 영어 교과서에서 받는 위로-1950년의 영어

by 미학자P

제가 교재를 모으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다른 장르를 더 선호합니다만,

앞선 글에서도 살짝 말씀드렸다시피 어쩌다 보니 교과서 희귀본 몇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경매로 낙찰받은 물건들입니다.


오늘 보여드릴 소장 책은 무려 1950년도의 영어 교과서입니다.

더 정확히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 4월 20일에 나온 책으로,

전쟁통 속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 제 손에 오게 된 귀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 책들 연도 보는 법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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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이고, 개정판 발행 연도를 보시면 4283년 4월 20일이라 적혀 있습니다.

오래된 책에 익숙하신 분들은 어렵지 않겠지만, 요즘 젊은 분들이라면 익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단기로 계산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4283년에서 2333년을 뺄셈하시면 오늘 연도가 나옵니다.

4283-2333=1950

네, 1950년입니다.


저는 한국전쟁 이전의 책과 그 전후로 가치를 크게 둡니다.

이 책을 낙찰받은 것도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책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1950년대 학생들은 어떤 영어를 배웠나 궁금해서였습니다.

미들 스쿨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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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시리즈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낙찰받은 이 책은 3번째 시리즈입니다.


첫 챕터를 펼치고 저는 크게 놀랐습니다.


왜 1950년쯤이라 하면, 지금보다 쉬운 영어를 배웠을 거라 지레 짐작했을까요?

상당한 수준입니다. (.. 이래 봬도 저 통번역대학원 출신^^)



이하 책에 대한 이야기는 가독성을 위해 '~했다'체로 적어보겠습니다.






첫 챕터의 내용이 무척 감동적이고 동기부여가 된다.

Lesson 1의 소제목은

Advice to the third year pupils.

3학년 학생들을 위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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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s and girls, you are lucky because you are given the opportunity to develop your minds so as to let them keep pace with your growing bodies. Do not suppose opportunity will knock twice at your door.


"소년 소녀 여러분

성장하는 몸과 함께 여러분의 생각도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으니 여러분은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기회가 두 번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mind는 단순히 한국식으로 마음이라기 보다, 정신과 사고력 이런 능력에 대한 것일 것이다. 배움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1950년도에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학생들은 분명 기회를 얻은 학생들이고, 운이 좋다. 이런 기회는 분명 두 번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배움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마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나는 왜 이 대목에서 위로를 받는걸까?

위로보다, 격려가 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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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뒤,

이 책은 세월로 인해 바스러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안에 담긴 소중한 문장의 지혜들이 75년 뒤의 사람인 나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런 순간이 컬렉터에겐 꽤나 감동적이고 숭고하게까지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 다른 단원으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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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연설이 실려있다.

연설문으로 공부를 했구나.

당시의 좋은 글들을 고르고 골랐을 것이다.

잊지 말자, 때는 1950년이다.


어떤 대목에 필기를 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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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한국어 설명이 없는 정석적인 영어 교과서의 자태 속에서 드디어 한국 문장들이 보인다.

배운 영어 표현들을 활용해 번역해 보는 과정인 것이다.

그 예문이 그 시절의 예의를 보여주는 듯하여 재미있어 올려본다.


1. 얌전한 남 학생은 여 학생을 놀리지 않습니다.
2. 마루에 침 뱉는 것은 대단히 나쁩니다.
3. 지나간 사람의 뒤를 돌아보는 것은 실례입니다.
4.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 가로막지 마시오.
5. 사람이 옆에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 마시오.


1번도 웃기고,

5번도 웃기다..


후반부에는 올림픽도 나온다.

올림픽 영어 아나운서로 경기 중계를 한 나, 괜히 이 대목이 무척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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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단에 발음 기호까지 모조리 알차게 적혀있는 것이 인상 깊다.

후반부로 갈수록 깨끗해지는 책,

역시 이 책을 공부했던 학생도 초반에만 의욕이 넘쳤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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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영국 지도도 달려있다.


1950년도에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가 본 한국 학생이 몇이나 될까?

이 지도를 보며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 보았을 그 시절의 학생들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오래된 교과서 수집의 별미는 낙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필기를 살펴보다 마지막 장에 학생이 그려놓은 그림을 발견했다.

그림 실력이 제법 수준급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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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는 필기체 잘 못 쓰는데...

1950년도의 학생은 필기체도 낭만이다.

그리고 남학생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your mouth my mouth, kiss ok'

라고 적혀 있는 것 같다.


귀엽다.


이성에 한창 눈을 뜬 사춘기 소년의 책이었을까?


그 시절 소년이면,

지금은 살아 계실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감히 상상이 안 가는,

1950년대의 낭만 한 조각을 발견한 듯하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그 낭만 한 조각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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