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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Apr 25. 2021

나답게 사는 삶

책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을 읽고

 인간의 욕망이 쌓아올린 바벨탑.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도시도 결국 바벨탑의 욕망이 투여된 건 아닐까. 더 높이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 자신의 삶을 갈아먹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노예 같은 인생을 사는 삶. 어딘가 애처롭고 안타깝다.


 한 6년차 때부터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나는 그저 내 처지와 나이만 탓했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를 몰라 괴로워했다. 그런데 몇 년간 그렇게 고생하고 나니 깨달았다. 나는 주체적인 삶을 원한 거였다고. 나는 누군가에게 이끌리고 복종하고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했다. 내 솔직한 감정과 욕망을 외면한 채 다른 사람에게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삶을 힘들어했다. 내가 언제든지 대체되는 조직의 부속품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애니어그램 결과 예술가형이다. 예술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데 운 좋게(?) 교사가 되어 매월 정기적인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봉급자이다. 그런데도 나는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늘 찾아 헤매는 방랑자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내 하루를 타샤 튜더 할머니처럼 완벽하게 예술가처럼 세팅하는 게 꿈이다. 텃밭을 가꾸고 바느질을 하며 동화를 쓰는 삶. 생각만해도 설렌다.


 그런데 소개팅을 나가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제 N년차이니 통장에는 잔고가 얼마쯤 있겠지? 직장에서는 인정받고 있는지? 주변 인맥은 어떠한지가 더 관심의 대상이다.


어린왕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아마도 그 집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창가에는 예쁘게 핀 제라늄 화분이 놓였고, 지붕 위로 비둘기가 날아드는 멋진 장밋빛 벽돌집을 봤어요.”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쉽게 떠올린다.
“시세 100만 프랑 짜리 집을 봤어요.”
그래야 비로소 어른들은 탄성을 지른다.
“정말 멋지겠구나.”     


 결국 이러한 사고방식이 삶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왜 모두가 일직선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걸까? 얼마든지 우리는 다채로운 삶을 살 수 있는데 말이다.


 이 책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작가의 생각의 깊이와 사유에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고 싶다. 나를 만나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보헤미안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여주인공 에스메랄다가 바로 보헤미안, 집시였다. 집시라고 하면 거리의 부랑자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요즘에 보헤미안은 예술, 여행, 자유로운 연애 등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통용하는 의미로 쓰인다.  


 인간의 삶이 꼭 태어나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삶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또한 아등바등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월급을 쏟아 붓는 삶도 서글프긴 마찬가지다. 작가는 코하우징(Co-housing)이라는 주거 공동체와 코리빙(Co-living)이라는 공동 주거 형태를 제안한다. 또한 유튜브 채널 ‘작은 집으로 크게 살기Living Big in a Tiny House’도 소개한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작은 집도 이렇게 실용적이고 감각적으로 꾸밀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감탄했다.


 각자도생이니 흙수저니 부정적인 단어는 삼가고 삶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창출해보는 건 어떨까? 꼭 모두가 사는 방식으로 살 필요는 없다. 휩쓸려 살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답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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