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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떡 Mar 28. 2024

사당행 열차

단편소설, 엽편소설 | 벚꽃색 우산

이윽고 환승역에 다다랐다. 3개 노선이 겹치는 역이었다. 도착 방송이 나오기 전부터 2번 칸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챙기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느라 여기저기서 비닐 점퍼가 바스락거렸다. 현주는 감았던 눈을 뜨고 가방을 움켜쥐었다. 이전에 인파에 휩쓸려 이 역에서 잘못 내린 적이 있었다. 지하철 문 바깥에서 가방을 놓쳤고, 떨어진 가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떨어진 가방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주가 가방을 줍는 사이에 전차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탑승했다. 뒤늦게 현주가 다시 탔을 땐 이미 자리가 다 찬 뒤였다. 그날 현주는 다섯 정거장이나 지난 후에야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현주는 가방이 열리지 않도록 여미고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현주는 늘 2번 칸을 고집했다. 매번 사람들 틈에 끼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환승역에 가면 한꺼번에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새로운 사람들이 타기 전에 재빨리 움직인다면 내려야 할 역까지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버스로 30분. 지하철로 환승해서 다시 48분. 넉넉 잡아 1시간 반에 가까운 출근 시간에서 앉아 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기회였다.


언니는 달랐다. 언니는 진작부터 사람이 덜한 칸을 탄 뒤 눈치껏 일찍 내릴 사람들 앞에 있다가 자리가 나면 앉는다고 했다. 그 사람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아냐고 묻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 사람 앞에 설 자리가 있느냐는 거라고 했다. 문가나 다른 칸과의 연결 통로나 노약자석 앞은 안 됐다. 일반석 앞 설 자리. 그게 중요했다. 


심호흡을 하고, 네가 우산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누구든 앉아 있는 사람 발치에 납작 엎드리는 거야.


사람들은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우산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따금 오늘 비가 온다고 했나, 하는 표정으로 의아하게 내려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자신의 물건이 아닌 우산을 두고 내렸다. 우산이 된 언니는 편도 1시간 10분의 지하철 통근 시간 중 약 1시간을 앉거나 누워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예고에 없던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저녁, 언니가 사라졌다. 


CCTV에 찍힌 언니의 모습은 예상대로였다. 목뼈부터 등뼈를 둥글게 말고 잠든 중년 남성 앞에 서더니 손잡이에 손을 걸고 앞을 보았다. 같은 칸을 탄 정수리와 정수리와 뒤통수, 손잡이로 뻗은 손과 커다란 가방 사이에 선 언니의 어깨가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였다. 심호흡을 하는 것 치고는 숨을 너무 크게 쉬는 것 아닌가, 생각할 즈음 언니가 조금 작아진 것이 눈에 띄었다. 역 하나를 지날 때마다 언니는 점점 작아졌다. 3개 역이 지났을 때, 언니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철도공사의 직원은 요즘엔 이런 사람들이 많다며 혀를 찼다.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이런 말 미안하지만 내가 해줄 말은 분실물 센터에 가보라는 것밖에 없어요. 현주는 혹시 뭐라도 발견되면 연락해달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철도공사 직원은 맑은 날 잘못 들고 온 장우산을 거들떠보듯 거추장스럽다는 표정으로 현주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환승역에서 사람이 빠져나간 뒤에도 2번 칸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새로 탑승한 사람들이 다 타기도 전에 자리가 가득 찼다. 현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현주가 일어나는 시간은 6시 10분이었다. 쉬는 날 일어나는 시간은 대체로 8시 30분이었다. 하루에 2시간 20분씩 잠을 뺏기고 있는 셈이었다. 통근 시간과 통근을 위해 준비하거나 퇴근 후 집에 와서 정리하는 시간을 노동 시간에 합친다면 하루에 14시간을 노동하는 꼴이었다. 출근이든 퇴근이든 고개를 꺾고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면 몸 안쪽 어딘가에서 우산 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현주는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려 애쓰며 잠을 청했다. 노래에 집중하다보면 자칫 가사를 듣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언니는……언니는…….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서울에 들어온 뒤였다. 열차 안에 사람이 가득했다. 현주의 도착역까지는 아직 10분 가량 더 가야 했다. 현주는 다시 잠을 청하려 고개를 꺾었다. 문득 발치에 우산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벚꽃색 3단 우산이었다. 오늘 비 예보가 있었던가? 현주가 우산을 발로 슬쩍 밀자 우산이 뒤집어지면서 먼지 묻은 면이 보였다. 바닥에 오래 놓여 있었던 듯 그쪽 면은 위쪽의 벚꽃색과 달리 회색빛을 띠었다. 현주는 자고 있는 옆 사람 쪽으로 우산을 더 밀고 눈을 감았다. 10분. 10분을 더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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